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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Jul 25. 2022

법, 그 차갑고도 따뜻함에 대하여

<최소한의 선의> 서평,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지난 3월에 한 권의 책을 주문했었다. 제목은 <최소한의 선의>로 문유석 판사, 이젠 문유석 작가의 다섯 번째 책이다. 서울중앙지법에서 부장판사까지 지냈으나 로펌은 싫고, 그저 글 쓰고 여행하며 살겠다는 그의 성품은 책의 대략적인 온도를 짐작하게 한다.


   한참 전 주문해놓고 책장의 배경으로 남겨진 책을 이제 손에 잡았다. 드물게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에 대한 작가의 짤막한 SNS 게시글 덕분이다. 판사 출신 작가가 드라마 속 한 변호사에게서 ‘현실 직장인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의’를 보았다고 하니, 그 ‘최소한의 선의’를 가지고 어떤 글을 풀어내었는지 궁금할 수밖에.



   ‘법대로 하자’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그 용례는 보통 인정과 사정을 배제하고 원리원칙에 따르자는 것이다. ‘법’은 발음마저 대쪽 같아서, 폐음절 하나가 파열음으로 시작해 불파음으로 닫힌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도 분명한 것으로, 옳고 그름, 선과 악에 관련된 문제로 다가온다. 법정을 다룬 콘텐츠에서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까지 작가가 강조하는 법의 정신은 원리원칙이 아닌 타협이다. 권선징악보다 선과 선의 조율에 가깝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진리가 아닌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한 약속이며, 법은 그 존엄을 지키는 수단이다. 서구 문명은 이를 모든 이들에 대한 최선의 자유 보장, 즉 적법절차의 실현으로 구체화했다. 정해진 법률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이도 자유를 제한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법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적법절차 외에는 어떤 가치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와 사상도 법 앞에서는 하나의 객체가 되며, 생각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의 생각보다 더 신중하고 세밀하여 때론 답답하다.


   인터넷의 기사 한 줄로 명백해 보이는 사건도 몇 개월의 심리가 이어지는 모습에 불평하곤 한다. 그러나 법은 원고와 피고를 심판하지 않고 타협점을 찾는다. 형사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자 심판이 아닌 공공복리와 개인의 자유 간 타협점을 찾는 과정인 탓에 결과가 대체로 시원하지 않다. 신속하고 통쾌한 정의를 위해 말 그대로 ‘마녀사냥’이 이루어지던 역사를 반성하는 것이다.



   문유석 작가는 전작 ‘개인주의자 선언’에서도 드러나듯 인간 세상에 냉소적인 편이며, 그런 태도는 이번 저서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문화에서나 냉소적인 사람이 환영받기는 어렵지만, 유달리 법조인은 냉소를 지녔다는 것에 안심된다. 혹시 나와 만나는 법조인이 열정을 가졌다면, 그 열정의 방향이 나와 같을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가 '우영우'라는 법정 드라마를 왜 좋게 보았는지 이해가 된다. ‘우영우’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소소하고 잔잔하다. 시원하게 악인을 심판하는 판결도 없다. 때론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대리하기도 하며, 사회적 편견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정밀한 타협의 과정을 제시한다.


   이 드라마에서 송사는 권위적인 심판보다 존엄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유무죄를 가려내지 않고 저지른 만큼만 자유를 제한받게 하는, 손해 본 만큼 보상받게 하는, 유무형의 재산 침해를 막고자 절차적 타당성을 따진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과하지 않은 '최소한의 선의'다. 이 모든 과정은 선악의 조미료를 걷어낸 적법절차 그 자체의 담백함을 느끼게 한다.



   단편적인 선역과 악역은 이제 인기가 없다. 선과 악이 뒤엉킨, 다층적인 캐릭터가 인기 있다. 사실 오래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글을 쓸 시절에도 그랬다. 빈약한 인간관을 미디어의 자극으로 감췄던 것이 이제 효력을 다한 것이다.


   모두가 안다. 인간 세상에 정답이 분명한 문제는 드물고, 모두가 각자의 선을 추구하며 살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여전히 가슴으로는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며 악인을 찾아내는 그 쾌감에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뉴스를 보며, 학교와 직장생활을 하며, 가끔은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다.


   이제는 달고 짠 선악과 시비보다 존중과 타협의 슴슴하고 느릿한 맛에 익숙해져 보자.




+ '우영우' 9화에서 이를 드러내는 대사가 등장했다. 극 중 존경받는 상사 정명석 변호사의 말이다.

매사에 잘잘못 가려서 상주고 벌주고, 나는 그렇게 일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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