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의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퇴근 후 수영을 합니다
퇴근은 분명히 했는데 계속 돌아가는 머리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분명 몸은 집에 있는데 영혼이 회사에 묶여버린 상태. 잠은 자야 하는데 눈이 말똥말똥해서,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잊어야지' 한다고 정말 잊을 수 있는 단순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영을 한 뒤로 바뀌었다. 그 어떤 치욕을 당한 날이더라도, 제아무리 강력한 고통체가 올라온 날이더라도 수영장에서 나올 때의 나는 회사에서의 내가 아니었다. 수영장엔 영험한 힘이라도 있는 것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안수에 담갔다 나온 것처럼 사람이 바뀌었다. 그 어떤 다짐으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래서 다들 수영, 수영 하는 거였구나. 수영의 효험에 나는 감탄했다.
오늘도 새로 맡은 원고가 골치라 머리엔 열이 잔뜩 올랐다. 외근이 점심시간이랑 겹쳐서 평소라면 느긋이 기다렸을 햄버거를 기다리지 못하고 언제 나오는지 두 번이나 물어봤으니 말 다했다. 겨우 나온 햄버거를 입에 욱여넣고 오후 내내 종종대고는, 스스로가 별로인 인간 같아서 축 처진 기분으로 퇴근했다.
그런데 수영을 하고 나오는 길, 아까 그 일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이라면 '오리발 껴서 하나도 안 힘드네. 내일 새벽에 자유수영 조져야 살 빠지겠다.' '자유형 팔꺾기 쉽지 않네. 계속해봐야지 뭐' 이런 것들이었다. 육지의 근심 걱정에 비하면 너무나 산뜻해서 고민 축에도 못 낄 생각들.
마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머리는 덜 말랐고 브라도 하지 않은 여자가 수영장 유리문에 비쳤다. 철딱서니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양손에 오리발과 수영가방을 달랑거리며 걷고 있었다. 세미 정장을 입고 종종대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수영을 하면 다른 시공간의 내가 되는 것 같다. 그곳은 허우적이 기본값이어서 마음껏 실수해도 되는 세계다. 거기서 난 접영 폼이 허접스러운 초짜고 선생님한테 물 맞아가며 배우는 열등생이다. 그런데 가끔은 혼나면서 웃기도 한다. 육지에선 아무도 함부로 혼낼 수 없는 어엿한 어른인 내가 물속에 들어왔단 사실 하나만으로 아이처럼 막 지적받을 수 있다는 게 신나기 때문이다.
수영은 잘할 필요가 없다고 내가 정한 유일한 종목이다. 잘하려는 마음이 없는 세계에서 나는 완벽하게 안온하다. 육지의 근심 걱정 다 내려놓고 잠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