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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Aug 05. 2023

교정만 하다 퇴근하는 날의 평온

내향형 편집자의 최애 업무

이번 주는 교정만 보다가 끝났다. 원래도 회사에서 거의 말을 안 하지만 이번주는 거의 컴퓨터만 보다가 끝난 것 같은 느낌. 향형 인간인 나에겐 사람과 감정 써가며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엄청난 장점이다. 평화 그 자체, 직업만족도가 최상을 찍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글과 씨름하는 일의 기쁨

교정교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업무 중 하나다. 책 읽는 것과는 다르지만 글을 읽는 일이기 때문이다. 는 일이 왜 좋을까. 읽는 건 보는 것과는 달리, 눈으로 글줄을 따라가며 머리를 쓰는 일이어서 하고 나면 운동한 것처럼 성취감을 주기 때문이다. 교정이라는 게 단순히 맞춤법에 맞춰서 글자만 고치면 되는 게 아니라, 저작권 확인은 물론, 각주에 빠진 정보 채워넣기 등등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남들은 내가 평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엔 조용히 김이 나고 있다. 보글보글 끓는 주전자가 되어서 퇴근 후 샤워를 하면 실제로 머리에서 흰 김이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그치만 그건 운동을 마쳤을 때의 상쾌함과 비슷해서, 오늘도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보람을 안겨준다.


게다가 교정교열은 MBTI의 J인 나에게 맞춤한 일이다. 한때는 한글 조판자가 되어 볼까 생각했을 정도로 아래아한글로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종이로 교정을 볼 때는 할 수 없지만, PC교라고 불리는 아래아한글 파일 상태에서 교정을 보는 일은 내 전문이다. 글자에 스타일을 먹이고 뒤엉켜 있는 조판부호를 정리하고 각 요소를 적절한 위치에 배열하기만 하면 꽤 매끈한 원고가 된다. 멀끔해진 모습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집안일 같달까. 내가 편집자로 일할 자격이 있나 자괴감이 들 때 PC교를 보면 자기 효능감이 다시 올라온다. 좋아하는데 잘하기까지 하는 일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교정교열은 의외로 주도성을 느낄 수 있는 업무이기도 하다. '맞춤법과 매뉴얼이 다 있는 거 아냐? 거기에 맞춰서 고치는 것뿐인데 뭘 주도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일엔 규정되지 않은 빈틈이란 게 있다. 편집자가 판단해서 '이렇게 하자!'라고 결정할 수 있는 구석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에세이를 편집하는데 저자가 다른 좋은 책의 구절을 많이 인용해두었다. 그렇다면 그 인용구는 따옴표 문장 그대로 문단 안에 둘 것인가, 개별 문단으로 나누어서 인용문 스타일을 적용할 것인가? 이렇게 하면 좋다는 가이드는 있지만 판단은 편집자 몫이다. 글을 읽었을 때 인용문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본문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따져봐서 결정할 수 있고,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통일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인용문인가에 따라 중요한 것은 별도의 문단으로 처리하고 아닌 것은 그냥 문단 안에 둘 수도 있다.


신입 땐 이런 게 일일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게 불편했다. 물어본다고 누구 하나 똑 부러지게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어 답답했다. 그치만 지금은 이 빈틈이야말로 편집자가 자기 머리를 써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소중하다. 작가조차도 크게 생각지 않았던 부분을 제안하고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건, 내가 스스로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자긍심을 준다. 생각 없이 작가한테 다 물어보고 맞춤법검사기만 돌려서 책을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나말도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누군가는 인용문 문단 나누기같이 작은 것 하나 바꾸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나를 하찮게 볼 수도 있지만, 작은 걸 고민하지 않으면 독자가 불편해질 거라는 생각을 하면 작은 일이 작지 않은 일이 된다.

 

맞춤법 검사기가 나온 지 오래고, 챗GPT는  분명 나보다 맞춤법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치만 '이 부분을 이렇게 하면 읽기 더 편하지 않을까? 여기 이 정보가 빠져 있으면 읽는 사람이 궁금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일하는 건 기계보다 내가 잘한다고 믿는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보람까지 주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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