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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Sep 01. 2023

편집자 모 씨의 문해력 고백

중요한 건 물어볼 줄 아는 태도

나는 글을 고치는 일을 한다.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게, 글을 그냥 고치면 되는 게  아니라 잘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잘 고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잘 이해하는 것이다. 뭐가 됐든 이해가 돼야 건드려볼 엄두라도 내볼 수가 있지 않겠는가. 편집자는 요즘 다들  문제라고 하는 문해력이 좋을 거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나는 별로 문해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익숙지 않거나 수준이 조금만 높아져도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네'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최근에 경제경영서 편집을 맡으며 이 문제를 다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돈을 못 벌어서인지 경제경영서와는 담을  쌓고 사는데, 경제경영서 중에서도 난도가 높은 책을 맡게 되었으니 사태가 심각했다. 한 문장을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읽어봐야 그나마 이해가 되는데, 그저도 경제 배경지식이 조금이라도 필요한 부분은 골백번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검색을 해서 어찌어찌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을 때는 답이 없다. 멘붕 상태. 나 어쩌지.

 

사실 처음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이거 나만 모르는 거 아냐? 일반적인 독자들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훌훌 읽어버릴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나만 대충 넘어가면 되는 거 아닐까?' 나의 경제 문해력이 평균 이하라서 기초적인 부분도 이해를 못하고 헤맬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였고 누군가한테 나의 무식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모르는 걸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냥  일자무식임을  고백하고 한껏 몸을 숙이며 저자에게 물어봤다. '선생님, 이 부분은 저만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이해가 안 돼서요.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다행히 정말 좋은 저자분이셔서 나의 수준 낮은 질문에도 늘 성의껏     대답해주셨다. '뭐 이런 무식한 편집자가 다 있지?' 하고 생각하셨어도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저자의 눈높이 설명 덕에 비로소 일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나에겐 그게 중요하다.


한 번 무식쟁이 고백을 하고 나니 나의 질문은 거침없어졌다. 그 이후로도 꽤 여러 번 모르는 부분을 여쭤봤고 저자분께서는 성심성의껏 설명해주셨다. 이건 책을 편집하는 건지, 경제  강의를 듣는 건지 혼동스러울 정도다. (편집자라는 직업의 장점은  이렇게 공짜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저자분께서도 '아, 이 부분은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수 있겠네요. 저는 늘 보는 자료라 어려울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그 부분은 좀 더 쉽게 써볼게요.'라고 하시는 경우도 생겨났다. 나의 무식함을 드러냄으로써 책을 쉽게 만들었다. 무식한 것도 꽤 괜찮은데?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편집자는 물어보는 사람이구나. 모를 땐 거침없이 물어보는 것도 책을 잘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구나. 물론 세상의 모든 글을 다 이해할 정도로 배경지식이 풍부한 똑똑이라면 아는 대로 고치면 된다. 하지만 독자가 꼭 자신만큼의 배경지식을 갖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책이란 건 몰라서 읽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인 순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편집자에게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물어본다는 건 편집자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책이 일단 세상에 나와 버리면 독자는 저자에게 뭐 하나 물어보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출판사에 질문 메일을 보낸다는 건 굉장한 정성이 드는 일인 데다, 귀찮음을 극복하고 메일을 보내더라도 저자에게 질문이 가닿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출판사 사람들은 참 바쁘다.) 요즘은 작가들이 개인 SNS 하나쯤은 운영하고 있어서 직접 DM을 보내는 것도 가능한 시대라지만, 그 역시 녹록지 않은 일이다. (부끄럽잖아. 나만 그런가?) 그러니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편집자가 많이 물어봐놔야 한다. 독자들의 예상 질문을 책 나오기 전에 뽑아놓는 작업이랄까. 만약 물어봤다가 '정말 나만 모르는 거였구나'라는 사실이 확인되더라도 어떤가. 나 혼자 바보 좀 되고 마는 게 낫지, 자기도 정체를 모르는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추구해온 편집자의 모습은 뭐든 아는 척척박사의 모습이었는데, 늘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몸에 힘을 좀 뺄 수 있게 됐다. 편집자가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지. 그저 모르는 걸 모르는 척하지 않고 제때 물어볼 줄 아는 용기만 갖고 있다면 잘 모르는 책도 편집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뻔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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