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호찐빵 Oct 16. 2023

나의 작은 즐거움

시간이 다 내 꺼! 24시간을 보내는 방법

왔다. 이곳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층의 오래되고 작은 이 아파트가 내가 살 공간이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과 함께 살 신혼집이자 나의 첫 집. 혼자서 때로는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도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대구에 있는 우리 집이었다. 그런 우리 집이 이제는 이곳이 된다. 결혼식까지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신혼집에 같이 들어가기로 한 건,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게 정서적 독립의 시간이 왔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과 함께 경제적 독립은 했지만 아플 때 투정 부리고, 집안일이 귀찮으면 엄마나 동생을 찾던 나는 정서적 독립의 필요성을 알면서도 미뤘다. 대학원 그림 검사 수업에서 교수님은 가족관계는 지나치게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지나치게 가까운 가족관계로 인한 나의 의존성과 부담을 고스란히 담아낸 내 그림을 보면서 이제 내가 쥔 끈을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너무나 다정하게 때로는 미워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얽힌 단단한 애증의 끈을 놓을 시기가 왔다.


작고 귀여운 우리 집 :)

나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끈을 사랑하는 누군가와 묶어 또 하나의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깊이 있는 관계지만 지나치게 서로를 종속하지 않는 건강한 관계. 이런 내 마음을 우주에서 들었는지 예비 신랑이 자란 지역은 내 친척이나 친구 한 명 없는 곳이었다. 


낯을 가리는 나는 새로운 우리 집 적응기를 가지려고 신혼집과 본가를 오가면서 지내보기로 했다. 먼저 일주일 정도 신혼집에 머무르려고 작은 캐리어에 짐을 챙겨왔다. 예비 신랑은 야간 근무자라서 그가 일하는 시간에 나는 자고, 그가 자는 시간엔 내가 깨어있었다. 


꼭, 첫 독립을 한 1인 가구가 된 기분에 설레기도 했는데 작은방을 꽉 채운 택배 상자를 뜯어 하나하나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나니 금방 시간이 남아돌았다. 




나는 예전 직장과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백수가 되었고, 대학원 졸업 후 신청한 자격증은 아직 심사 중이라 원하지 않는 공백기가 3개월 정도 생긴 상태였다. 학생일 때도 직장인일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갈망했는데 막상 24시간이 다 내 것이 되니 어안이 벙벙했다. 


어린이 시절에는 시키지 않아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잘 놀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의미 없는 인터넷 기사 훑기, 주식보기, 폰게임, 쇼핑하기, 친구 만나서 밥 먹기처럼 기기와 함께하거나 돈을 써서 시간을 채우는 방법만 아는 어른이 되었다. 


혼자서 시간을 어떻게 보냈더라. 사람이 옆에 있거나 사물이 옆에 있는 게 당연한 일상을 보내서 노트북 충전기마저 두고 온 이곳에서의 시간이 낯설기만 했다.


‘이건 아니지!’ 혼자 아침을 먹으면서 (속으로) 외치고 옷을 챙겼다. 아침이 되어 퇴근하고 돌아온 그와 가볍고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하고, 나는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돈 쓰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걸 떠올렸을 때 생각난 게 산책이었다. 나는 구석구석 열심히 간판을 구경하고, 사람을 구경하며 걸어 다녔다. 


다른 아파트 앞 대로에 조성된 산책로를 걷는데 그제야 내가 뭘 좋아했는지 하나하나 생각났다. 베란다 문을 확 열어 맞이하는 아침햇살. 목적 없는 동네 산책. 조용한 공간에서 책 읽기. 좋아서 끄적이는 글. 이런 것들이 인생 앞에 두 발 딛고 서 있게 하는 내 힘이자 즐거움이었다. 


열심히 걸었더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생각을 멈추고 후다닥 집으로 갔다. 담담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 몸 안을 맴돌았다. 무언가를 할 때는 늘 생각이 많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이 평온했다. 

예랑 생일상 차린다고 유튜브 보고 만든 하트맛살전. 역시, 요리는 쉽지 않다.


문득, 감사했다. ‘익숙해지다.’라는 동사와 낯가리는 나에게 강제로 주어진 자유시간은 다시 없을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타인과 함께 발맞추는 법을 배우고,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알아가는 어른의 시간을 겪고 있다. 


낯선 지역에 적응 중인 나를 위해 휴무일마다 함께 뚜벅뚜벅 돌아다니는 그(우리는 차 없는 뚜벅이들이다). 둘 다 자취 경험이 없어서 그는 요리를 전담하고 나는 보조가 되어 뚝딱거리는 식사 시간. 구축아파트라 소음은 있지만 덕분에 혼자 있는 밤이 무섭지 않은 공간. 막상 해보니 일부터 십까지 다 해야 하지만 생각보다 재밌고 뿌듯한 집안일. 


‘독립은 정말, 좋은 거구나.’ 


취업에 도움 안 될 아침에 방 환기하기, 혼자 세탁기 돌려보기, 같이 청소하기 같은 일상은 내가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나는 바쁘게 하루를 살아내던 상반기와 반대 선상에 있는 지금의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격증이 발급되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도 시간을 보내는 나만의 작은 즐거움을 잊지 않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또 한 번의 서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