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 투성이다. 오늘은 금융노조가 내건 현수막을 봤다. 거두절미하고 딱 한 마디만 써놨다. '윤 종 규 퇴진. 규탄의 대상과 요구 사항을 단 5자로 함축하다니. 참 시적인 사람들이다.
보아하니 현수막의 위치도 절묘하다. KB국민은행 신사옥 바로 옆에는 다섯 개의 간이 휴게소가 있는데, 거기에 하나씩 걸어 놨다. 시공사가 KB 직원들 쉬라고 설치한 장소에 노조는 현수막을 붙였다.
그곳은 현수막 명당으로 보였다. 여의도역에서 샛강역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윤종규 퇴진을 안 보고 넘어갈 수 없다. 좁은 길목에서 통행세를 요구하는 깡패 무리 같다. 나는 점심밥 먹으러 나왔을 뿐인데 시선과 의식을 강탈당했다. 메뉴에 대한 고민 대신 윤종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글자 크기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하나하나가 사람 몸보다 더 크다. 멀리서 현수막을 보고 있노라면 옆에서 누가 확성기를 틀어 놓고 외쳐대는 느낌이다. 노조원 수십 명이 그 자리에 있었던들 이 현수막 하나만 했을까. 나는 이날 새삼 현수막이란 매체의 위력을 실감했다.
현수막은 어느 곳에나 있다. 구조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걸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가로로 펼쳐 놓거나 가로등이나 건물 외벽에 족자처럼 늘어뜨려 놓을 수 있다. 인터넷이 안 터지는 격오지,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에도 현수막은 들어간다. 현수막을 피하는 일은 중력이나 태양빛을 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다.
질기기도 하다. 폴리에스테르 소재로 돼 있어서 웬만한 환경 변화에는 꿈쩍하지 않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모든 KB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에도 윤종규 퇴진 현수막은 그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겠지. 그러고 보니 현수막은 전천우다.
어디에나 걸리고 날씨의 영향도 받지 않는 현수막. SNS나 유튜브 같은 온라인 매체가 나온 지 오래지만, 그 아날로그적 홍보 방식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성행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버려진 현수막은 준비 안된 퇴직만큼이나 쓸쓸하다. 퇴직하는 순간 모든 장점은 단점으로 바뀐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다. 잘 썩지 않는 소재인데 재활용도 어렵다. 현수막으로 앞치마나 장바구니를 만들어 쓰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런 걸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자가 넘쳐나는 시대에 누가 현수막을 두르고 요리를 하겠는가. 나와 온 가족이 먹을 식재료를 현수막에 담고 싶겠냐는 말이다.
은퇴한 현수막의 최소 90%는 모두 소각된다고 한다. 현수막에게 제2의 인생은 없는 셈이다. 애초에 예견된 일이었다. 대게 현수막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망일이 정해진다. 아파트 분양이 완료되고 마트 문화센터 모집이 종료되고 로드샵의 프로모션 기간이 끝나면 둘둘 말려 폐기차를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다. 잉크가 선명히 남아있어도, 구김살 없는 탄력을 자랑해도 예외는 없다. 윤종규 퇴진 현수막도 윤 회장이 퇴진하면 KB 지하창고 어딘가에 둘둘 말려 있다가 난지도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