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정말세이 굿바이
한두 시간도 못 자고 촬영장으로 떠나는 길.
어떤 이에게는 촬영은 고되고 힘들고 정신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늘 즐겁고 유쾌하고 흥분되는 일이었다.
내가 기획한 대로 혹은 더 잘 나오기도 하고, 잠시 잠깐 집중하지 않고 무성의하게 찍으면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는 아름답지만 알쏭달쏭한 세계랄까.
1년 반이 넘게 매달 만나던 촬영 스텝들과 마지막 인사라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찡해지고 '퇴사는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랑은 계속 일하고 싶다'라는 마음을 안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짐을 옮기고 분주하게 시작되는 촬영장의 아침, 나는 조용히 스타일리스트 실장에게 다가가 나의 퇴사를 알렸다.
"실장님, 나 이번 주 금요일까지예요"
"네?! 아유... 실장님.... 진짜 힘들어했었잖아요. 잘됐다 진짜 고생 많았어요.."
"?!"
나의 힘듦을 그들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내가 너무 티를 냈었나? 아니면 은연중에 내 한숨과 짙은 다크서클이 다 드러냈었던가?
"그전에 있던 분도 그렇고, 그 회사가 어떻게 사람을 대하고 부리는지... 제가 너무 잘 알잖아요. 진짜 잘 됐어요! 쉬면서 하고 싶은 것도 하고 푹 좀 쉬어요~. 제가 최근에 책을 봤는데 40대 후반부터 50대쯤 되는 세대의 CEO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게 있대요.
그게 상대에 대한 공감 능력의 결여. 자신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사악한 짓을 해도 아무런 양심적 가책이나 상대방이 많이 힘들 수 있다는 생각하는 능력이 상실되는 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 밑에서는 답이 없어요. 계속 힘들 뿐이지. 진짜 푹 쉬어요. 알았죠?"
모르겠다. 온전히 이해받는 느낌.
한 달에 한 번. 회사에서 보는 동료들, 상사들보다 나를 덜 마주치는 실장님에게서 가슴 묵직한 위로를 받았다.
그래, 어쩌면 나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어느 누구에도 진실한 '공감' 그 자체를 받지 못해 더 힘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늘 자기 자리 보존하기에 바빠서, 말이 바뀌는 상사들.
힘든 일은 싫고, 어떻게든 칼퇴를 위해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트는 동료들.
팀장으로서 본인을 지켜주지 않았다,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원망하는 팀원들.
무관심한 눈으로 자기 일만 하고 사라지는 타 부서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온전히 내 마음을 들여다봐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그것이 그곳에서 무너지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가.
실장님의 따스한 위로와 격려, 그 밖의 촬영 스텝들의 짧지만 묵직한 '수고했다'는 인사들을 안고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을 시작하면 무조건 집중에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 내가 있어서 마음이 놓여서인지 그날따라 유난히 잡담이 심하고, 집중하지 않는 팀원을 보면서 예민함이 화르륵 올라왔다.
보통 때 같으면 '집중하자!'라고 분위기를 잡았겠지만,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화를 내어 무엇하나라는 마음으로 꾹꾹 삐져나오는 짜증을 눌러 넣고 그렇게 오전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전날 밤, 1~2시간밖에 자지 못한 여파는 점심시간이 돼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점심 식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저 눈이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안 자면 뭔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사고 칠 것만 같은 느낌.
밥을 먹다 말고 나와, 스튜디오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잠을 잔 지 얼마쯤 지난 걸까.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잡담 소리에 슬쩍 잠이 깼다. 내가 아는 이름들이 거론되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한 신나는 험담 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그 험담의 주인공이 아닌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로, 거침없이 일방적인 험담이 한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 험담을 들어주는 친구는 그저 '아 진짜? 아.. 그래요?'라는 대답뿐.
저 친구는 타인에 대해 그리 왈가왈부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분명 누군가의 험담을 저렇게 들어주는 것이 본인도 편하지 않을 텐데... 고생이 많군....
다시 잠을 청하고 싶은데, 험담의 데시벨이 너무 높아 쉽게 잠이 다시 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일방적인 적개심이다. 이해 없는 무조건적인 공격이네..
'저렇게 크게 떠들어댈 정도라면, 촬영장 누가 들어도 자고 있는 내가 들어도 꺼릴 게 없다는 뜻일까?'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 짜증이 왜 저렇게 쌓인 걸까. 저 친구는 험담의 당사자와 그렇게 디렉트로 연결이 된 것이 없는데.... 그녀가 품고 있는 적개심은 정말 순수한 본인의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함께 다니는 동료들의 것이 범벅이 된 결정체일까...
잠결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적개심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다.
함께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는 자신과 친한 이들의 것이 뭉쳐져 있다. 이 회사의 가장 큰 고질병.
대표가 시작한 타인에 대한 무분별한 험담과 적개심, 불만이 일하는 아이들에게까지 번지고 녹아들었구나.
서로 이해해주기는 커녕, 일단 들이박고 보는구나..
예전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땐, 정말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서로 힘드니까 이해하고, 살펴주려고 했었는데...
그런데 나 역시 그런 불만과 적개심에 물들어 타인들에게 그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얼마나 그들과 닮은 짓들을 하곤 했던가.
그런 인간이 되기 싫다. 얼른 떠나자.
자는 듯 눈을 계속 감으며 생각한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잘한 일이라는 것.
이 짓눌리듯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고 바위 하나가 얹어진 듯 답답함을 내려놓는 길은 그것밖엔 없을 거라는 것.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험담하며 내 살 길을 도모하며,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늘 피해 다니며 '헤헤헤 오늘 난 칼퇴 성공!'이라는 머저리 같은 삶을 사는 건, 사는 것이 아니다.
오후 촬영을 마무리하면서도 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촬영을 끝내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길. 누구보다 따뜻하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 스타일리스트 실장님과 포옹을 나누었다. 다시 연락하자며, 퇴사 후 좋은 일만 있을 거라는 그녀의 말이 나의 심장에 쿡 와서 박혔다.
삶이란 그런 거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에게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사소한 험담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그리고 또 그것을 계기로 새롭게 한 발을 내디뎌볼 수 있는 것.
이제 정말 끝이다. 안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