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못 알아듣겠다.
영상통화가 아님에도 전화기 너머로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르는 아내 얼굴이 보인다. 대충 알아들은 말로는 하루가 안 울고 어린이집에 잘 들어갔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를 건네받고 혹여나 아이가 울까 서둘러 원으로 들어가셨다. 아내는 혼자 문밖에 남아 신체의 일부가 떼어져 나간 것처럼 아파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내 아이를 빼앗아 간 것 같아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며 펑펑 울었다.
애는 씩씩하게 등원했지만 엄마는 씩씩하지 못했다.
그렇게 8개월이 된 하루는, 인생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조산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찍 시작했던 육아휴직이 이른 복직을 만들었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알아듣지 못하는 울부짖음이 되어 전화기 너머 나에게 전해졌다. 그래도 아내는 다시 멋지게 일을 해내는 워킹맘이 되어 삶의 활력을 찾아갔다.
오전 8시 등원 오후 4시 하원.
우리의 삶의 시간도 어린이집 운영시간에 맞춰 변해갔다. 아내는 직장이 멀어 1시간 반 거리를 출근했고,
다시 1시간 반 동안 같은 처지의 직장이 서울인 경기도민들 사이에 끼어 퇴근해야 했다. 7시 50분 아이를 등원시키며 출근했던 아내가 집에 돌아오면 저녁 8시였다.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좀 더 유동적으로 일 할 수 있던 내가 저녁 10시 출근, 아침 10시에 퇴근으로 시간을 조정했다. 그 당시 나는 친형과 함께 세탁공장을 운영하며 세탁물을 수거해 깨끗하게 세탁하여 돌려주는 일을 했다. 가끔 아내가 회식이나 야근을 할 때면 카시트에 아이를 태운 채 수거하러 다녔다. 먹고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다. 다행스러운 건 나는 내 친형과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고, 아이도 한 살 터울로 태어나 우리 형제는 동병상련이었다.
아침에 퇴근해서 잠을 자고 일어나 아이를 하원하고, 저녁시간까지 놀아주고 아이의 밥을 차렸다. 이유식을 먹일 땐 편했는데 유아식을 먹이면서 아이밥과 우리 밥을 따로 차려야 했다. 아이에게 간이 안 된 음식을 먹여야 해서 저녁밥을 매일 두 번 차렸다. 6시에 한번 8시에 한번. 아내가 퇴근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내와 아이가 잠이 들면 출근을 했다.
내가 일이 급해 서둘러야 할 때면 퇴근하는 아내와 현관문에서 바통터치 하듯 인사하고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내와의 교대근무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내와 나는 같은 고등학교의 밴드 동아리였다.
졸업 후 노래를 만들어 나는 기타 치며 노래하고, 아내는 베이스기타를 맡아 같이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결혼 전까지 연애와 함께하는 즐거운 음악생활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진 못했지만, 오인용 애니메이션에 하노의 노래가 삽입되면서 취미 수준이지만 간간히 음악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기에 나에게는 음악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음악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하지 못해 생업은 필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잠자는 시간을 줄였다.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하루 4시간.
낮과 밤이 바뀐 채 일을 하며, 잠을 줄인 시간에 연습을 하고 노래를 만들기 위한 이런저런 작업을 했다.
잘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틈틈이 잠을 잤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와 보냈다.
집 근처 공원, 키즈카페, 아웃렛, 놀이공원, 수영장 등등 잠도 잘 못 자면서 전력을 다해 아이와 놀아주기 위해 돌아다녔다. 평일 오전 10시에 퇴근을 하니 아이와 놀러 다니기에는 편했다. 잠과 바꾼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는 고장이 났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이 크게 고장 났다. 산후 우울증처럼 우울했고,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심심찮게 했다.
나의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원망이 점점 커져갔다. 일도, 육아도, 음악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는 과부하 상태였다.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은 과욕이 결국 전부 망가트리고 있었다.
지칠 때로 지친 나는 아내와도 많이 다퉜다. 사실 다퉜다기보다 나의 일방적인 투정과 책망이었다.
자취의 경험이 많은 내가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살던 아내보다 살림을 더 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점에서 아내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사소한 일에도 아내를 탓하며 못살게 굴었다.
"오빠가 행복해야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아내는 항상 같은 말을 했지만 매번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내였다.
그런 아내는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전문병원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정신, 심리 치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림치료와 상담치료를 통해 나의 문제는 내가 보낸 어린 시절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14살 때 처음 일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도와야 했기에 먼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비롯한 주방보조일을 했다.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갔다. 의정부에 위치한 이태리 레스토랑의 홀은 깔끔하고 넓었지만 주방은 좁았다.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 안에서 우유박스를 뒤집어 깔고 앉아 쉬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성인이었다. 그리고 흡연자였다. 평일 5시간 주말 10시간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 나는 주방 화로의 열기와 담배연기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나는 흡연자가 되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다른 친구들이 학원에 있는 시간에 여기저기에서 일을 했다.
평일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거나, 부모님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트럭 위에서 만들어 파시던 떡볶이를 도와서 팔기도 했다. 손에 주부습진을 달고 살았으며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4년제 대학교에는 입학할 수 있었다. 내가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냈지만 그마저도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뒀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공부를 하는 시간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그 시절 집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일을 했는데 새벽 3, 4시에 일이 끝났다.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출근을 했고 홀에서 서빙을 하던 나는 시급을 올려주는 조건으로 주방에 들어가 닭을 튀겼다.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머리에 기름이 베어 흐를 정도로 닭을 튀겨냈다. 그때 기름이 튀고 솥에 덴 팔뚝의 상처들이 아직도 남아있어 그 기억들은 오랫동안 선명하다.
청춘의 캠퍼스 생활은 한 학기 맛보기로만 끝내고 군대로 도망갔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아빠이지만 내 아이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참 많다. 집이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과 멀지 않아 자주 데리고 놀러 가는데, 그곳에서 나와 많은 추억을 만드는 내 아이가 나는 부러웠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놀이공원을 잘 몰랐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종종 여행도 다니고 가족끼리 시간을 많이 보내는 기는 했으나, 평소 사업으로 항상 바쁜 아버지와 친할머니와 함께 종교활동에 매진하던 어머니는 항상 집에 없었다. 형은 친구가 많은 편이라 친구들과 놀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친구가 없던 나는 늘 집에 혼자 있었다.
티비의 채널을 8번으로 돌리면 하루종일 만화 시리즈가 방영되었는데 핑크팬더, 보거스, 가제트 형사 등을 보며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내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상담사 선생님은 내게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지난 과거에 묶여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 내 꿈,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이렇게 내가 지워진 채로 살아가다 보면, 묶여버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의 가족과 아이를 원망하며 살아갈까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힘들겠지만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 보기로.
나에게로 가는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