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루클린 시너 Mar 05. 2023

왜 미국은 일본이라면 무조건 '베리 머치 서포트' 할까


대통령의 3ㆍ1절 기념사가 논란이다. 역대 대통령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집권 첫 삼일절 기념사에서 한일관계 메시지를 중요하게 내놓는다. 각자 방점을 찍는 부분이 다르긴하지만, 한일이 과거사는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자는 기조가 일제 저항운동을 기리는 기념사의 기본값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매우, 많이 달랐다(very much different).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며 일본의 반성이 아닌 우리의 자성을 촉구했다.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파트너가 됐다”며 일본의 개과천선을 강조했다.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이 짚었던 ‘과거사=일본 책임’ 기조는 빠지더니, 반대로 역대 대통령들 대부분 피했던 ‘내탓이오’ 모드가 들어갔다. 대통령 삼일절 기념사를 두고 논란이 뒤따른건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주목할만한건 미국의 반응이다. 불과 하루도 안돼 즉각 환영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마치 기다렸다는듯 미 국무부는 “윤 대통령은 일본과 미래지향적인 관계에 대한 비전을 분명히 했고, 미국은 이를 매우 지지한다(very much support)”고 했다. ‘베리 머치 서포트’는 웬만하면 나오기 힘든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미국의 입장에 매우 부합할때만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 대통령의 3ㆍ1절 기념사를 듣고 미국이 ‘베리 머치 서포트’한건 역대 어느 정부서도 보기힘든 ‘베리 머치 디퍼런트’한 모습이지만,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보면 새삼스럽다고 하기도 힘들다.  


2차 대전이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은 단연코 일본이다. 미국은 우방국에도 등급을 나누는데 일본은 유럽의 영국, 중동의 이스라엘, 북미의 캐나다, 태평양의 호주와 같은 탑티어다. 말하자면 일본은 미국 글로벌 동맹의 센터라인이자 아시아 거점인데, 이 지위에서 내려온적이 한번도 없다.

세계전쟁을 일으킨 침략국이자 간크게도 미국과 한판 붙겠다며 하와이를 공습하고, 이때문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얻어맞은 극동의 섬나라가 80년 가까이 미국의 ‘베프’가 될수 있었던건 지정학을 빼놓곤 설명할 수없다. 

미국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유사이래 전무후무한 슈퍼 파워로 우뚝섰지만, 여유와 평화를 만끽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곧바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적과 맞닥뜨리는데, 바로 거대한 제국 소련의 등장이다. 동유럽부터 극동 아시아까지 광활한 땅을 차지한 소련은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느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용이했다. 반대로 미국 입장에선 두 곳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을 필요성이 생겼는데, 이때문에 유럽의 독일, 아시아의 일본을 프런트 라인으로 서둘러 재건할수 밖에 없었다. 독일과 일본은 소련의 파고를 막는 지정학적 방파제였던 셈이다. 

CSIS


소련, 일본을 파괴하러온 일본의 구원자 

미국에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의 뿌리는 깊다. 일본이 아시아를 차례로 점령하며 제국주의 팽창에 한창 열올리던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입장에서 당시 일본은 조만간 미국의 주적이 될 정도로 급증하는 현실적 위협이었고(지금의 중국과 유사한), 그래서 머지않아 반드시 꺾어놓아야할 적대세력이었지만, 그 이후엔 더 큰 위협을 막기위해 곧바로 일으켜세워야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미국 직업외교관 존 V.A 맥머리는 자신의 비망록(1935년)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일본을 제거할 수 있다해도 극동이나 세계에 축복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일본이 제거되더라도 새로운 골칫거리들이 생겨날테고-동양의 정복을 꿈꾸는 경쟁자로서-일본 대신 제정 러시아의 계승자인 소련이 등장할 것이다.” 

다시말해 미국이 일본의 야욕을 꺾어놓는다해도 소련이라는 더 큰 위협세력과 직면할 것이란 예언이다.

예일대 교수인 니콜라스 스파이크먼도 일본이 장차 미국의 중요한 방파제 역할을 할걸로 예측했다. 1941년 12월 초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고, 바로 다음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해 말, 스파이크먼은 미국 지리학회 정치학회 합동회의서 ‘프론티어, 안보 그리고 국제조직’이란 논문을 발표하는데, 핵심은 이렇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소련을 견제해야하고, 이를 위해선 일본ㆍ독일과 동맹을 결성해야한다는 것이다.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이제 막 2차대전에 발을 담근지 얼마안된 시기에 주적 일본을 껴안아야한다고 주장을 했으니(당장은 아니지만 전쟁서 승리한후) 이적행위 아니면 사이비 학자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소련 봉쇄 정책의 아버지’ 조지 케넌 역시 2차대전후 국제 질서를 미국과 소련, 영국, 유럽, 일본 등 5대 세력으로 나누고,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기위해선 소련을 제외한 3개 블록과 연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케넌은 “1949년말과 50년 초반 미국에선 일본의 비무장화를 좌시할수 없다는 확고한 정서가 고조됐다”며 “정반대로 앞으로 언제까지고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켜야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미국은 이미 모스크바가 새로운 세계대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마음을 굳혔고, 이에 맞서기 위해 군사 전진기지로 일본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당초 미국은 골칫덩이 일본과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힘을 빼놓을 작정이었다. 독일은 동서로 나누고 베를린은 4분할해 승전국이 통치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는 일본을 아예 영구 비무장 중립국으로 만들 생각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이 급부상하자 워싱턴은 이 계획을 수정한다. 일본을 비무장 중립국화한다는 건 소련의 코앞에 미군이 주둔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소련만 좋은 일 시켜준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황당한 소리 정도로 취급받았던 맥머리나 스파이크먼의 주장은 미국이 전후 국제질서를 조각하며 중요한 이론적 배경으로 재평가 받게된 셈이다. 

일본이 구사일생한건 전적으로 지정학적 위치가 만들어준 축복이라 해도 무방하다. 극동 끝자락에 위치한 해양세력의 시파워(Sea Power)로서 아시아 근해든, 대륙이든 팽창하기 용이했다. 그 결과 전쟁을 일으켰고 참패했지만, 곧바로 부활한 이유도 대표적인 대륙세력이자 랜드파워(Land Power)인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방파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범국으로 원자폭탄까지 얻어맞고 만신창이가 된 일본이 다시는 대륙진출이나 패권추구의 꿈도 꾸지 못하게 군사정치적으로 거세당하기 직전, 소련이 등장하며 구사일생한다. 어찌보면 소련의 급부상과 이에대한 미국의 과도한 우려가 일본의 인수분해를 막아준 것이다. 소련은 일본을 파괴하러온 일본의 구원자인 셈이다. 


미국, 확신범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독일은 전후 냉전의 서막이 오르며 일본과 비슷한 전략적 요충지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미ㆍ영ㆍ프ㆍ소 4개국의 점령지로 변해 국토가 분단되고 수도 베를린도 장벽으로 나누기로 결정한 1945년 얄타회담을 피할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은 본토를 그대로 유지했다. 독일에 비하면 대단한 은혜를 입었다. ‘베리 머치 특혜’를 받은 셈이다.

앞서 말했듯 맥아더는 일본을 영구 중립국으로 만들려했다. 연합군은 일본도 독일처럼 영토를 분할하려는 구상을 했다. 실제 1945년 8월 13일 미국 국무부에서 작성된 ‘종전 이후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SWNCC 70/5)’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미국이 간토 지방과 긴키 지방을 점령하고 소련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을, 영국은 규슈와 긴키 지방을, 중화민국은 시코쿠를 각각 점령해 통치하는 분할점령안을 기획했다. 수도 도쿄는 미ㆍ영ㆍ중ㆍ소 4개국 공동 점령한다. 그 실행은 9월 이후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상륙 점령하면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 계획을 철회한다. 왜일까.  

1945년 얄타회담이 열린 리바디아 궁전에는 회담에 참여한 루스벨트·스탈린·처칠(왼쪽부터)의 밀랍인형이 있다. 시사IN 남문희

우선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다른 잣대로 대했기 때문이다. 둘다 전범국임에도 독일이  확신범이라면 일본은 정상참작이 가능한 공동정범으로 바라본 측면이 있다. 독일은 1871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통일한후 1945년 2차대전이 끝날때까지 끊임없이 역내 긴장을 유발한 문제아였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 열강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아시아가 주무대였기에 미국의 관심을 받기까지 시간이 더 걸린 셈이다.  

더 중요하게는, 유럽에서 독일의 역할과 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이 달랐다. 미국은 이미 유럽에 영국이란 든든한 파트너가 건재했다. 독일에게 점령당해 수모를 당했지만 프랑스도 있었다. 러시아가 서유럽으로 밀고 들어온다해도 미국의 앞줄에서 막아줄 프런트 라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아시아에선 소련의 팽창을 막아줄 변변한 세력이 일본 말고는 전무했다. 당시 장제스의 중국은 대만에 갇혔고,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은 미지의 존재였다. 이때문에 미국은 일본을 승전국끼리 분할하지 않고 단독 점령해 동아시아에서 장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초기지로 삼기로 계획을 바꾼 것이다.  


미소 경쟁 틈바구니를 역이용한 일본

그런데 일본에 더 큰 축복이 있었으니, 바로 옆에 한반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배가시키는데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을 철저히 활용했다. 미소 갈등의 역학을 교묘히 이용해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그 댓가로 일본 국토를 보존받게 된다. 정작 전범국으로서 책임을 져야할 일본은 대사면을 받고, 반대로 일제 식민지에서 갖 풀려난 한반도가 대신 뒤집어 쓴 셈이다. 

미국이 처음부터 한반도 분단을 계획했다고 보긴 힘들다. 미국은 2차 대전 막바지에도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카이로회담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기때문이다. 더구나 앞서 언급했듯, 일본 열도로 연합국들이 분할할 계획까지 미리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결국 미국의 입장이 바뀐건, 그렇게 될수밖에 없는 외부 변수가 생겼다는 뜻인데, 바로 소련의 급격한 팽창이었다. 그리고 패전 이후를 내다보며 자신의 지정학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일본의 계산도 영향을 미쳤다.  


1945년 즈음 일본은 이미 패배를 예상했다. 관건은 언제 패배하느냐였다. 비밀리에 종전 전략 수립을 담당한 해군 소장 다카기 소키치는 1945년 3월 종전 전략에 관한 중간보고서 초안을 작성한다. 소련은 미국의 아시아 단독 지배에 반대할텐데, 이를 미국이 혼자 대응할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이 미국이 방파제로서 일본의 역할을 깨닫게 될 것이고, 이 길만이 일본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아시아에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반드시 소련이 먼저 만주와 한반도에 들어온 이후에야 항복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이 먼저 한반도를 차지하면 한반도가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은 예정대로 분할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이 한반도를 장악하면 미국으로선 완충지대가 사라지게 되니 손해이고, 이를 막기위해선 미국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할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 사실을 간파했다. 그전까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간과하던 미국에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소련이 한반도에 최대한 빨리 진입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국의 한반도 진입은 최대한 늦추는 것이야말로 일본이 다시 살아날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반도 북부보다는 제주도 방어에 집중했다. 비록 미국이 곧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위해 제주도로 향할 수 있어 최후방어선을 치는게 필요하지만, 반대로 위쪽에서 소련이 남하할걸 알면서도 방비에 소홀했다. 중국내 일본 병력 1백만명 규모를 만주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차이나는 클라스> JTBC


이후는 우리가 아는대로다. 소련이 한반도에 상륙하자 깜짝 놀란 미국은 내셔널지오그래픽 벽지도에서 한반도 가운데에 부랴부랴 선을 그었다. 미소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도록 유도하는 일본의 전략은 먹힌 것이다.  

일본의 전략은 소련에도 나쁘지않은 카드였다. 스탈린은 당초 계획대로 일본을 분할해 훗카이도 등을 달라고 미국에 요구했다. 그런데 트루먼이 이를 거부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한반도 허리춤인 38선을 기점으로 절반씩 나누자고 제안한다. 소련 입장에선 섬인 훗카이도보다 소련 본토와 육로로 이어지는 북한이 훨씬 매력적이다. 당시 아시아에서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겨울에도 얼지않는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이왕이면 본토와 더 가깝고 철도로 연결되는게 좋기 때문이다. 훗카이도의 하코다테나 오타루보다 북한의 원산항과 청진항이 훨씬 효과적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북일본 대신 북한을 넘겨받은 것이다. 

이로서 일본이 바라던대로 일본은 완벽하게 부활한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소련 팽창을 막는데 효율적인 지정학적 위치를 가졌다. 이를 바탕으로 2차대전 직후 냉전으로 진입하는 지정학의 격변속에서 미소 경쟁을 적절히 이용해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독일처럼 가혹하게 대하기는 커녕 미국의 최우방으로 재건시키도록 유도했다. 이때부터 아시아에서 미국의 일본 우선주의가 시작됐고 미국은 일본에게, 일본은 미국에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덩어리가 됐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자 미국에서 ‘베리 머치 서포트’가 나온건 이미 80여년전 예견된 미래였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미일동맹에 굳이 한국을 끼워넣으려고 하는걸까. 그건 다음에 다뤄보겠다.   

 


[참고문헌]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조지프 나이

『지정학의 힘』 김동기

『미국외교 50년』 조지 케넌

『예정된 전쟁』 그래이엄 앨리슨

 “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6 일본의 4국분할이 한국의 남북분할로 바뀌게 된 사연” 아주경제. 2021.7.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