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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루클린 시너 Mar 26. 2023

왜 미국은 툭하면 고립의 유혹에 빠질까

사실은 깜짝 놀랄만한 사실: 미국은 초식남 스타일 


미국은 원래 제국주의 DNA가 없었다.! 지구 반대편까지 정치 군사력을 투사하는 제국주의적 성격과는 체질상 상극이었다.!! 람보와 코만도로 상징되는 근육질 마초, 불철주야 세계평화 국제질서 수호에 여념없는 미군은 만들어진 이미지일뿐 실상은 울타리 밖을 나가기 꺼려하는 초식남에 가깝다.!!!


읽자마자 무슨 황당한 주장이냔 반발이 나올듯하다. 오히려 인류역사상 로마와 더불어 가장 제국의 성격을 갖춘게 미국 아니냐고. 80년대 한국사회 대학가에서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반미투쟁을 벌인건 뭐때문이냐고. ‘미제’라고 하면 미국산(Made in USA)을 가리키는 미제(美製)를 떠올리기보다 미 제국주의의 줄임말인 미제(美帝)가 더 먼저 떠오르지 않느냐고. 지금도 한미가 연합훈련을 할때면 북한이 “미제와 괴뢰”라며 친절하게 구분해주지 않느냐고.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 외교를 관장하는 부서 이름부터가 제국 느낌 물씬 풍기는 국무부(Department of State)아니냐고 말이다.

실제 미국은 제국에 가깝다. 지난 반세기 넘게 전세계 구석구석에 미군을 보냈고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를 국제표준으로 만들었다. 유엔 안보리 국가중에 다른나라를 상대하는 행정 조직 이름을 외교나 외무가 아니라 국무라고 사용하는 곳은 미국밖에없다. 과거 내무, 재무 역할도 담당하다(우리로 따지면 외교부와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등이 결합된 성격) 이들 기능이 떨어져 나간뒤에도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름을 역할에 맞게 고치지않은건 미국으로선 외교가 곧 국내 문제라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불과 80년 전만해도 미국의 이런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대륙이든 해양이든 팽창에 열을 내던 당대의 여느 열강들과 달리 아메리카라는 울타리 안에서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사는 걸 추구했다.  냉전 이후 미국은 지구 구석구석 개입하는 관여 정책을 추진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가급적 복잡다단한 구대륙의 세력다툼에 휩쓸리지 않고 신대륙에서 혼자 여유를 만끽하려는 은둔 성향이 컸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미국은 ‘원래’ 제국주의 DNA가 없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면 크게 틀일 일이 아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국제적 강대국으로 부상한 19세기 말 이래 펼쳐온 국제외교 정책은 한마디로 고립과 관여(The Policy of Isolation and Engagement)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다른 나라의 정치경제안보에 적극 개입하고 역내 국제질서와 역학관계를 자기 입맛에 맞게 구축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다른 세계가 피 터지며 싸우든 말든 제발 도와달라 요청하든 말든 미국 우선주의의 고립주의를 추구해 온 것이다.

국제관계를 자유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로버트 케이건은 『밀림의 귀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전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이례적인 시기였다. 대부분 미국인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세계에 두루두루 깊숙이 관여해야 미국의 국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던 시간이다. 냉전시대 이전에 미국은 그런 시각을 지녔던 적이 없다”


미국의 고립주의: 별일없이 산다 이렇다할 고민없다


일반적으로 미국의 고립주의 DNA는 독립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을 거치며 영국을 비롯한 구대륙 열강과 가급적 거리를 두는게 미국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96년 퇴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뿌리깊은 반감때문에 특정 국가들과 반목하지 말며, 어떤 국가들의 열정적인 접근에도 연루되지 말 것이며, 바깥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동맹들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라”

워싱턴의 당부는 사실상 신생 독립국 미국의 대외 전략 근간을 이룬다. 제1차 세계대전의 뒤늦은 개입을 제외하면 미국은 적어도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이 공습받기 전까진 워싱턴의 조언대로 되도록 바깥 세계와의 분규나 동맹을 파하고자 신경을 썼다(팀 마샬, 2016)  

미국이 이런 기조를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천명한건 ‘먼로 독트린’이다. 1823년 12월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방침인데, 신세계인 아메리카 대륙의 문제는 미국이 알아서 할테니 구대륙은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꿔말해 유럽 열강들은 신대륙에서 더이상 땅 욕심을 내지말라는 경고였다. 당시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라를 확장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존 게스트의 그림에서 잘 보여주듯, 미국에 서부 개척은 종교적 소명이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과 같은 과업이었다. 대륙 통합이란 지상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선 서구 열강이 미국 울타리 인근에서 배회하는 걸 막는게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선 각자 영역 구분을 확실히 하는게 필요했다.

(물론, 미국적 시각에선 먼로 독트린이 미국의 고립주의 기조를 공표한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미국과 같은 대륙에 있던 다른 나라 입장에선 미국의 간섭을 합리화하는 방편일 뿐인 셈이다. 19세기말 포르피리오 디아스 멕시코 대통령이 “가련한 멕시코여! 신에게선 너무 멀고 미국에는 너무 가깝구나” 라며 한탄한 것도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의 개척사를 표현한 존 게스트의 '미국인의 전진'

어쨌든, 미국이 국가로서 기틀을 다진뒤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첫 목소리를 낸 게 바로 국제사회에서 외교를 최소화하자는 고립주의 기조였다. 그만큼 미국은 꿈의 신대륙인 아메리카 개척에만 관심이 있었다.     

미국이 구대륙의 열강에 맞서 고립주의(라고 쓰고 상호 불간섭 원칙이라 읽는)를 천명할수 있었던 건 미국의 지정학적 축복을 빼곤 설명하기 힘들다.

미국은 거대한 대륙국가이면서도 사실상 섬나라다. 동서는 각각 대서양과 태평양을 접하고 있고, 남북은 미국보다 국력이 약한 멕시코와 캐나다와 맞대고 있다. 나라 자체가 거대한 요새와 같은 셈이다. 따라서 육지로든 바다로든 본토가 침략당하는건 웬만해선 쉽지않은 일이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 독립을 인정받은 이래 본토가 공격당한건 그로부터 200년이 넘게 흐른 2001년 9월 11일이 처음이다.

미국은 이러한 지정학적 축복때문에 유럽과 달리 안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바다 건너 유럽에선 열강들끼리 피튀기는 세력다툼이 계속됐지만 미국은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한 대륙을 개척하느라 눈돌릴 틈이 없었다. 이미 내수 시장이 충분히 성장했기때문에 국제무역에 대한 의존도 역시 낮았다. 더구나 경제력이 커지니 그에 비례해 국력도 커졌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군사력도 갖출 수 있게 됐다. 유라시아가 초토화되어도 살아남는데 지장없는 '지정학적 지정생존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은 이렇다할 고민없이 사는게 재밌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것이다.


마지못한 1차 세계대전 참전과 책임 피하기


별다른 걱정없이 살던 미국은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바다건너 불구경하듯 유럽을 바라봤다. 먼로 독트린의 노선대로 제3자 관찰자 시점을 유지했고, 어느편에도 서지않는 중립을 택했다. 그런데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호가 격침되고 130여명의 미국 민간인이 사망하면서 국민적 분노가 커진다.

중학교 세계사는 이 사건으로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걸로 가르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이때도 최대한 참전을 피했다. 하지만 2년후 결정적으로 친머만 전보 사건이 발생한다. 1917년 3월 1일, 독일 외무장관인 아르투어 친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대사에게 암호 전문을 보낸다. 미국이 독일에 중립을 유지하는게 힘들다면 독일은 멕시코와 동맹을 맺고 미국을 공격하자는 내용인데, 미국에 의해 드러난다. 미국은 독일-멕시코 동맹을 저지하고 본토 방어를 위해 어쩔수없이 참전 결정을 하게된다. 미국은 적의 동맹이 될뻔한 멕시코를 손봐줄 법도 한데 그러지않았다. 멕시코 입장에선 미국이 침공하지 않은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가련한 멕시코여! 신에게선 너무 멀고 미국에는 너무 가깝구나”)

미국은 마지못해 참전했지만 막상 결정을 내리자 압도적 군사력을 선보이며 1년 7개월이라는 조기에 독일을 항복시켰다. 지정학적으로 요새같은 독특한 여건에 놓인 미국은 세계가 안전할때는 세상과 거리를 둘 여유가 있었지만,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싶을때는 전례없는 방식으로 개입해 세계의 면모를 변화시킨 것이다(케이건, 2018)


미국은 1차 대전을 기점으로 사실상 글로벌 슈퍼 파워로 부상한다. 그동안 영국이 지탱해왔던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는 사실상 무너졌다. 비록 승전국이지만 힘이 쇠약해진 영국 혼자선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영국이 힘을 못쓰는 사이 세계는 힘의 진공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시선은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이 더이상 지정학적 축복속에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안분지족하는걸 용인하지 않게 된다. 세계는 미국이 국제질서를 새로 잡아주길 요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며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한다. 1차대전 참전은 예외적인 시도였을뿐, 전쟁이 끝난만큼 아메리카라는 안락한 안식처로 되돌아가는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지금껏 이렇다할 고민없이 하루하루 즐거웁게 살았는데 이런 루틴을 깰 이유가 없었다. 전후 국제질서를 다시 잡는건 국제연맹이나 서유럽의 승전국들이 하면 될 일이었다.  

당시 여론도 이를 뒷받침한다. 1차대전 직후인 1919년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러한 역할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원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안해 창설된 국제연맹에 미국이 가입하는걸 기각시켰다. 한 상원의원이 “우리는 ‘미국인들을 위한 미국’과 ‘유럽인들을 위한 유럽’을 원하며 그것이 훌륭한 미국적 원칙”이라고 말할 정도로 고립주의 회귀 경향이 다시 강해졌다.(MIchael lind, 2006; M 베클리, H 브랜즈 2023)


불과 몇년전만해도 참전을 지지하는 여론이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후엔 참전은 끔찍한 실수였고 군인 수십만명이 헛되게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이 다수 여론이 된다. 탓할 대상을 찾던 이들은 대중이 속았다고 주장했다. 동부지역에서 발행되는 친영국 성향의 신문과 지식인들에게, 금융가와 무기 제조업체들에게, 미국 정부내 암약하는 영국 첩자들에게, 그리고 독일이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고 독일이 승리했다면 미국의 핵심 이익이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수많은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공통된 견해를 요약하면 “윌슨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케이건, 2018)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 조지프 나이도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에서 “지금은 범지구적 세력균형을 다루는데 있어 미국이 주요 역할을 하고있지만, 1930년대 미국은 심각한 고립주의에 빠져있었다”고 진단한다

조지프 나이는 이시기를 킨들버거의 함정으로 설명한다. 기존 패권국 영국은 역량이 부족하고 급부상하는 미국은 패권국이 될 의지가 없는 경우 국제체제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이다.

앞서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1930년대 대공항의 원인을 연구하면서 패권국의 책무에 주목했다. 1차 대전이후 불안정한 국제 경제체제를 안정시키기위해선 당시 패권국의 역할이 필요했음에도 당시 패권국 영국은 능력 부재로,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음으로 결국 대공황이 발생했다고 봤다. 사실상 미국의 탓에 무게를 둔 주장인 셈이다.


피하고 싶은 왕관, 패권국 되기


킨들버거는 패권국이 개방된 시장을 유지하고, 장기대출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환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거시경제 정책을 주도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금융 위기가 발생할 경우 유동성 공급에 적극 나서는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주문했다. 다시말해 패권국이라면 어느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체제 안정을 위해 직접 나서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권한보다 책임이 무겁고, 이익보다 손해만 덕지덕지 따라붙는 패권국의 지위를 최대한 피하려고 한건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질서를 다시 만드는 ‘반장’ 역할을 주저하는 사이 세계는 한동안 힘의 진공상태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경제 대공황은 전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질서의 퇴보를 가속화시키면서 파시즘이 자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이 기회를 이용해 나타난게 바로 히틀러식 전체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다. 불균형한 다극 체제가 형성되자 곧바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결국 1938년 두번째 세계전쟁이 터진건 미국의 무책임도 어느정도 책임이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번에도 고립주의 노선을 유지한다. 전쟁 초기 2년동안 미국은 참전을 꺼린다. 그러다 1941년 일본이 무모하게도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인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앞서 1차대전때는 독일-멕시코사이 미국을 공격하자는 모의로 그쳤지만, 이번엔 영토가 공격당하자 인식도 바뀌기 시작한다. 적대적인 독재국가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미국인과 미국인의 삶의방식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케이건, 2018). 고립주의가 관여로 바뀌기 시작한 순간인 셈이다.  

하버드 교수 그레이엄 앨리슨은 “미국은 1차대전 이후, 그리고 이전 세기에 그랬듯 그저 미국이라는 요새 안에 머물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갈수록 서로 연결되는 세계에서 더 이상 이런 길을 가는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진단했다(앨리슨, 2017)

이제 미국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서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설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국이 의도하지 않아도 점점 국제 문제에 얽히는 세계의 한복판에 살고있다는걸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1차 대전후 “윌슨 대통령 때문에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비난하던 국민들이 이제는 윌슨의 노력이 옳다고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미국의 국익과 삶의 방식을 지키기위해선 미국 안보의 최전선을 대서양과 태평양을 너머 구대륙으로 확장시키는 게 필요했다. 초식남 DNA는 퇴화하고 근육질 근성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고립의 전통은 이제 적극적인 관여 정책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조지프 나이는 이렇게 진단했다.

“미국의 세기의 출발점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대전에 참전키로 결정한 시점으로 잡는게 보다 정확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1차대전 직후 고립주의를 포기했다면 2차대전이 벌어졌을까. 러시아가 아직 소련이 되기 전 미국이 관여 기조로 돌아섰다면, 냉전시대는 오지 않았을까. 다만 확실한건 미국의 ‘우리끼리 잘먹고 잘살자’는 고립주의 DNA는 여전히 미국 대륙 깊숙이 단단히 박혀있다가 틈만 나면 활성화되려고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2010년 이후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정파에 상관없이 대외 정책이 비슷해진 이유와 이어진다.



[참고문헌]

그레이엄 앨리슨 『예정된 전쟁』

로버트 케이건 『밀림의 귀환』

조지프 나이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팀 마샬『지리의 힘』

M 베일리, H 브랜즈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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