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의 치열했던 고민은 욕심쟁이인 나답게 새벽 1시까지만 만화책을 보고 잠을 좀 줄여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오랜만에 신나게 만화책을 본 탓인지 어젯밤 꿈에서 계속 만화 캐릭터가 등장해 뛰어다니는 바람에 깊게 잠들지 못했다. 멍한 상태로 밖으로 나와 미리 준비된 토스트를 씹으며 어제 시간이 늦어 못 읽었던 만화책 마지막 권을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마음껏 만화책을 읽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쾌적한 곳에서 씻고 나와서 아침 바람을 맞으니 상쾌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여유롭게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가 왔다는 소리에 후다닥 올라타니 비수기에 평일이라 그런지 버스 안에는 외국인 관광객들만 몇 명 보이고 매우 한적했다. 대부분 부부 동반 관광객들로 보이는데 딱 한 명 중년의 남자 외국인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혼자 있는 여행객을 보면 괜히 동질감이 들어 말을 걸고 싶어지곤 한다. 물론 마음만 그랬다는 거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나는 괜히 대화가 길어질까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튼 뒤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다.
40여 분을 달린 버스가 드디어 정차했다. 이제부터는 산책길을 따라 쭉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구름이 많이 있어서 흐리긴 했지만 그렇기에 가끔 얼굴을 드러내주는 햇빛이 더욱 반가웠다.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미소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등장하는 다람쥐들에 놀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내 발걸음을 더 가볍게 만든다.
천천히 길을 따라 20분 정도를 걸어가다 보니 석굴암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이 보였다. 자유롭게 석굴암을 관람하며 많은 것을 느껴보고자 했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보안상의 문제로 사진 촬영도 불가했으며, 심지어 내부가 굉장히 협소하여 석굴암의 웅장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하여 과할 정도로 보호하는 게 맞는지, 조금 손상이 되더라도 원래의 가치를 공개하는 게 맞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석굴암 하나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못 봤다고 꼬장 부리는 건 절대 아니다. 툴툴툴.
생각보다 더 빨리 석굴암을 구경하고 나왔기 때문에 여유롭게 근처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나오니 섭섭함은 사라지고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하늘은 어디가 경계인지 모를 정도로 맑고 적당히 떠 있는 구름은 마치 하늘을 포근하게 덮어주듯 흘러가고 있다. 지나가는 길에 만난 대나무는 녹색과 하늘색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색이란 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것 같다.
예정에 없었던 역주행으로 석굴암을 방문한다고 이동 거리가 길어져서일까? 여행 중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방문해서일까? 이상하게 평소보다 배로 피곤해져서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숙소에 가서 체크인하기로 했다. 경주역 바로 옆에 있는 오늘의 숙소는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숙소였나 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손님이 외국인들이라 당황했지만, 침대를 배정받은 뒤 눕자마자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부스스 눈을 떠보니 밖은 이미 깜깜하게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경주역 근처에는 야경을 볼 장소들이 많아서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서려고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옆 침대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던 외국인 친구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친구가 씨익 웃으며 “Hi”라고 한다. 얼른 눈을 피하려고 했지만 선제 인사 공격(?)을 당한 나는 애써 웃으며 같이 “Hi~”라고 인사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원어민 발음으로 빠르게 쏟아져 나온 문장들은 내가 느끼기에는 이러했다.
(이 대화는 작가 본인의 상상력이 일정 부분 들어갔음을 미리 알리는 바입니다.)
외국인 친구 : 안녕~ 친구! 오늘 경주 날씨가 참 좋지? 그런데 일기 예보를 보아하니 저녁에 비가 올 것 같다고 하더군. 지금 나가는 거면 우산을 챙겨가는 게 좋을 거야! (완전 원어민 발음의 영어)
나 : (5초간의 정적, 내가 맞게 들은 건지 자신이 없음. 그래서 아직 잠이 덜 깬 척 눈을 비비며) ...오오, 땡큐...(하며 우산을 챙긴다.)
외국인 친구 : …… / 나 : ……
숨 막힐듯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어색함을 참지 못한 외국인 친구가 옆 사람에게 “Where are you from?” 이라고 물으며 상황은 종료되었고 나는 후다닥 방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건물을 나오며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을 알아채서가 아니라 누가 봐도 한국인이라서 그랬을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야경이 예쁘기로 소문난 <동궁과 월지>에서는 어디서 이렇게 쏟아져 나왔나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손에 손잡고 야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들에 매료되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혼자 이 예쁜 풍경을 보기 아쉬워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보다 내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한 엄마의 물음에 웃으며 답하고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을 공유하니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엄마의 표정과 옆에서 모자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해하는 질투 섞인 아빠의 목소리가 혼자라는 외로움을 잊게 해주었다. 뒤에서 지켜주는 부모님 덕에 아들이 걱정 없이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여행 중에 깨닫게 되지만 그건 조금 더 뒤의 일이다.
즐겁게 야경을 구경한 뒤 검색으로 우연히 찾은 숙소 근처의 술집에 가는 길에 비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 예보를 미리 알려준 외국인 친구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가지고 온 우산을 쓰고는 지도 없이는 찾기 힘들 것 같이 잘게 쪼개져 있는 골목길 사이를 누비며 목욕탕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여행자 술집 <어제 아래>로 향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들어가는 술집이라 조금 쭈뼛대긴 했지만 다행히 손님이 거의 없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혼자 온 손님을 전혀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맞아주신 사장님은 글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메뉴판을 건네주셨다. 이게 뭐지 하며 읽어본 메뉴판 첫 장에는 사장님이 이 공간을 사용하는 손님들에게 부탁하는 약속과 사장님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천천히 곱씹어 읽어본 글은 혼자 술을 마시기 전 속을 훈훈하게 달래준 좋은 에피타이저였다.
생전 처음 혼자 소주 뚜껑을 돌리는 기분은 조금 쓸쓸하기도, 조금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첫 잔과 함께 맛있는 안주를 입에 넣는 순간 이 감정은 기쁨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달았던 첫 잔이 아무 이야기로도 배출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서 다음 잔을 채운다. 조금은 씁쓸한 끝맛을 남기며 두 번째 잔을 비우고는 세 번째, 네 번째 잔까지 마신다. 술병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쯤 지금 내 잔에 담겨 있는 술이 혀가 아릴만큼 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태껏 마셨던 술이 달았던 이유는 나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들이 내가 가지고 있던 씁쓸한 기억을 나눠 가져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들떴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고 생각이 많아질 때쯤 끝나버린 소주 한 병은 그날 나를 적당히 기쁘게, 적당히 외롭게, 적당히 그립게 만들었다고 한다. ✈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