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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엘 Oct 24. 2021

06 밤이야! 우리 미국 갈까?

           국경을 초월하는 언어

밤이는 점점 내 삶 속에서 존재감을 넓혀갔고 결국 내 삶을 거의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누구든지 만나기만 하면 내 화두는 온통 밤이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고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지인들을 만나도

 나의 모든 화두는 밤이었다.

다른 이야기로 시작을 해도 결국 밤이 이야기로 귀결이 되었다.

사람들은 포기한 듯이 나의 입만 바라보다가 만남이 끝날 때도 있었다.

지루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에 대한 수다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강아지에게 열광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한참 밤이에게 빠져있던 그 시기에 나는  미국을 가게 되었다.

이것은 나의 두 번째 미국 여행이었다.

 

엄마와 동행했던 첫 번째 방문에서는 언니의 에스코트와 엄마의 콩글리쉬로 내가 영어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만 아시는 수준이지만 배짱은 우주적이어서인지

이상하리만큼 엄마의 의사전달은 잘 통했었다.

첫 번째 미국 방문의 경험으로 현지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념이 생겼었다.

하지만,

막상 두 번째 방문에서 나의 영어 실력에 현타가 왔었다.

여하튼 나는 너무나 아쉬운 영어 실력 탓에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를 영어로 주문해서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그때서야 비로소 알았다.     


바닐라~ 라테

그게 왜 그렇게 힘든 것일까?     

한 번은 내 앞줄에 서있던 외국인 남자가  바닐라 라테를 주문하길래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정말  그 사람과  똑같이 , 정말 똑같이 흉내를 내서 주문을 했었다. 


그런데 또 라테다.

그냥 라테!

바닐라 시럽이 없는 라테를 주었다.


왜? 정말 왜?

내가 듣기에 발음도 정확했고 악센트도 정말 똑같이 흉내를 냈는데!

앞에 그 남자랑 나랑 다른 게 도대체가 뭐지?

바닐라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내가 말하는 영어를 그들은 못 알아들었다.     

한편으로는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가?

아니면 설마 내가 인종 차별을 당한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뭐 까짓 껏 바닐라 라뗴 못 먹으면 어떻고 인종 차별당하면 어떠냐? 라며 나를 위안해 보았지만 

언어의 장벽은 별거 아니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라지고 

주눅까지는 아니어도 대한민국 아줌마가 가진 황당한 용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언니랑 수다를 떠느라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한국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올 때 미국에서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었는데 

이미 그 상상은 이미 우주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영어에 대한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채로 귀국하는 길에서, 그 상상은 현실로 소환이 되었다.


나는 미국인과  웃어가면서 공항 로비에 앉아있었다.  

설마 웃기만 했을까?

아니! 말도 했었다.     


우리는 서로의 반려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데 어떤 강아지가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길래 그 주인에게 물어보았다.

“ Why is she trembling?”

그랬더니 

“she is nerverous before boarding a plane.”

이게 대화의 시작이었고 나는 그녀의 말이 아주 잘 들렸고 그녀도 나의 말을 곧잘 알아들었다.

‘그렇지 이거지! 바닐라가 어려운 단어였던 거지!’     


우리의 대화의 대부분은 영어가 아니라 밤이의 사진과 영상들이 차지를 했고(한국에서 떠날 때 밤이의 영상과 사진을 핸드폰에 잔뜩 저장을 해 왔었다.)

주로 나의 짧은 영어와 그녀의 감탄사로 채워졌지만 분명 우리는 서로 웃어가며 대화를 나누었었다.     

내가 밤이 사진을 보여주며 

“I miss her.”라고 하면     

그녀는 "I Know I know"

내지는 “amazing!”

내지는 “ she's so very cute.”정도의 대화를 하는 식이었지만

 서로의 반려견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밤이가 매개체가 되는 그 대화에는 서툰 영어와 

인종차별로 인한 대화의 장벽이 생길 틈이 없었다.    


외국인과 소통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어쩌면 그네들의 언어나 나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서로의 반려견이 더 중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는 또 다른 언어였다.

이웃과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심지어는 언어의 장벽을 넘게도 해 주었다.

그래서 이 숨겨진 언어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보다도 더 힘이 있는 언어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의 소통의 중심에 밤이라는 언어가 있고 그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살아내고 있었다.

밤이야 우리 미국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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