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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원 Dec 19. 2019

영화<다우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화에서 건져올린 질문들 02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다우더

감독 : 구혜선

출연 : 심혜진(엄마), 구혜선(산), 현승민(어린 산)

개봉 : 2014. 11. 06



1651년 스페인 왕실에 공주가 태어났다. 마흔여섯 살의 펠리페 4세는 '마르가리타 테레사'라고 이름 붙인 늦둥이 공주를 애지중지했다.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인 '시녀들 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타이틀 이미지)'에 등장한 어여쁜 소녀가 이 마르가리타 공주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손들은 허약해서 대부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펠리페 4세는 두 번 결혼해서 아이 13명을 얻었으나 그중에서 열 살을 넘긴 아이는 세 명뿐이었다. 펠리페 4세가 아홉 번째 아이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를 애지중지했던 것도 그 위 아이 8명 중 일곱 명을 이미 잃은 후였기 때문이다.



마르가리타 왕녀(마르가리타 테레사)

그림 속 마르가리타 왕녀의 시간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른다. 어린이에서 소녀로 자란다. 귀한 혈통의 왕녀는 태어나 얼마 안 되어 혼처가 정해진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트 1세. 혼례를 치르기까지 마르가리타 왕녀가 자라는 모습을 레오폴트 1세가 있는 오스트리아 왕가에 보내기 위해 초상화가 그려지게 되었다. 그림 속 왕녀의 모습에서 합스부르크 왕가 혈통의 특징이 보인다.


'합스부르크 주걱턱'


합스부르크 가문에는 부정교합, 즉 위턱보다 아래턱이 더 돌출되는 현상이 유전되고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씹지도 못할 정도이고 음식과 침이 흘러서 옆에는 수건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시종이 있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자신들이 유럽 최고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은 이 귀한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자녀의 배우자를 모두 가문 안에서 정했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배우자인 레오폴트 1세도 11살 차이가 나는 그녀의 외숙부였다.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 있던 가문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외부의 '나쁜 피'로부터 가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가문 내 결혼으로 귀한 혈통을 유지했다. 하지만 유전 법칙으로는 순수한 피가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는 '나쁜 피'였다. 그렇게 태어난 귀한 혈통의 아이들은 대부분 약하게 태어나 어려서 죽거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마르가리타 왕녀도 22살에 죽는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스페인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중에서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을 특히 좋아했다. 젊은 라벨에게는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왕녀가 풍기는 고귀한 기품과 아름다움이 마치 자신의 이상형인 것처럼 미술관의 그 그림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1899년 라벨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피아노 작품을 쓰게 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화 <다우더>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피아노 곡이 있다. 피아노 선생님이 연주하고 어린 산이가 배우고, 나중에 성인 산이가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 집에서 연주하는 그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산이 엄마가 다정 엄마와 통화할 때 산이가 몰래 답을 보면서 문제집에 적어 내려가다가 책상에 엎드려 귀를 대고 옆 집에서 치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피아노 울림을 느끼며 가만히 듣는다. 그리고 산이 생일날 엄마가 친절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로 생일상을 차려준 후 산이가 속이 좋지 않아 밥을 안 먹으면 안 되는지 물어보자 밥그릇을 집어던지고 산이를 때린 날 피아노 선생님이 산이를 데려가서 안정시키고 나서 들려준 곡이기도 하다. 피아노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맞고 있을 때에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흐른다. 그리고 산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산이가 유품을 정리하러 엄마 집에 들렀다가 피아노 선생님 집에서 이 곡을 연주하고 영화가 끝난다.


영화 <다우더>의 테마곡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 산이와 피아노 선생님, 그리고 성인 산이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르가리타 왕녀를 추모하기 위해 쓴' 이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연주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죽은 이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이 곡이 흐를 때, 영화 안에서 추모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이 보인다. 어린 산이가 자신의 피난처 혹은 기댈 곳이라고 생각했던 피아노 선생님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맞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진다. 이때의 죽은 왕녀는 바로 '산이 자신'인 것 같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고 나와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 돌아갈 때 선생님이 "엄마가 많이 외로우셨겠다."라고 할 때의 산이의 대답이 조금 의아하다. "고맙습니다."


돌아가기 직전에 연주할 때의 죽은 왕녀는 '산이 엄마'인 듯하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엄마를 추모할 수 있는 마음이 산이에게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이 엄마가 떠놓고 간 빨간 핏빛 목도리를 한 산이를 보며 엄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연민이 산이에게 있다고 느껴졌다. 엄마의 행동이 용서되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의 삶이 외로웠겠다는 자각을 하고 산이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 듯하다. "내가 어떻게 엄마가 되냐"라고 울부짖던 모습에서 "어떤 딸이든 딸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산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통제된 혈통처럼 무균실 같은 인생이 아닌,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느끼며 다양한 감정으로 마음 면역력이 강해져서 단단하고 풍성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산이를 향한 이 바람은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들을 사전에 차단하고 방지해서 감정 무균실을 구축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속 감기도 겪으며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살라는, 나에게 보내는 응원과 지지 같다.



다정이 엄마가 산이 엄마에게 산이 생리 시작했냐고 물어본다.

이제 딸들 단속 잘해야 한다고, 어디서 임신할 수도 있는 나이라고.


다정 엄마 : 우리 딸들만 잘하면 뭐해, 발정 난 남자애들 천지가 우리 애들 보고 침 흘릴 텐데.



임종을 앞둔 산이 엄마는 병원에 온 성인 산이에게 "넌 분명 그냥 놔뒀으면 창녀가 됐을 거야"라는 말을 한다.

그에 앞서서는 "너는 누구 좋아하고 그런 거 하지 마라"



산이 : 아파.

산이 엄마 : 소독해야지. 더러운 애들 틈에 있었잖아.


비 오는 날은 산이 엄마가 손수 파란색 비닐봉지로 가방과 신발을 꽁꽁 싸매 준다.

더러운 것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산이가 학교에 다녀온 후 현관에 들어서면 신발부터 벗고 모든 것을 벗어서 내려놓고 욕실로 가야 한다. 매일.

산이 엄마는 피부를 벗겨낼 듯이 욕조에 앉은 산이를 씻는다.

밖에서 혹시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없애야 하니까.



붉은 피를 '줌 인' 하는 감독의 의도가 무엇일까? 어떤 의미를 전하고 싶었을까?


피는 혈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혈통이라는 표현은 보통 순수혈통을 말할 때 사용한다.

산이 엄마는 무엇으로부터 산이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세상이 더럽고 위험하다면, 함께 외출하고 돌아온 후 왜 산이에게만 더러운 것이 묻어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자신에게 묻은 더러운 것은 무엇으로 씻는 것일까? 잠깐씩 나오는 장면 속에서 산이 엄마는 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운다. 밤에는 창문을 덧문까지 잠그고 산이의 방은 밖에서 잠가서 산이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도터(Daughter)를 잘못 발음한 '다우더'라는 제목으로 엄마가 딸이라는 상대에게 가한 잘못된 교육을 나타내고 싶었다." 구혜선 감독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어쩌면 산이를 지킨다기보다는 산이에게서 다음 혈통이 이어지지 않도록 애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더러운 것, 나쁜 것과 섞일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듯이. 집안 곳곳을 정리하고 쓸고 닦고, 물건들의 줄과 방향을 같게 맞추는 산이 엄마에게서 결벽증이 보이기도 한다. 산이 엄마에게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이 집 안 만이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균실이자 피난처로서.


산이 엄마의 인생이 어땠길래,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시선으로 딸을,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까 안타깝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피가 산이에게 전해진 것이 못마땅했을지도 모를, 그래서 산이를 더더욱 강박적으로 대했을지도 모를 산이 엄마를 위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어야겠다.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부디 그녀의 삶이 편안하기를. 자신을 사랑하기를.





영화 <다우더>에서 건져 올린 질문들


나에게 엄마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딸'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아들'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부모님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자식은 어떤 의미인가?

* 사랑이 더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나?

* 사랑은 어떻게 폭력이 되나?

*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 나에게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건강한 거리'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피'는 어떤 의미인가?

* 나에게 '죄'는 어떤 의미인가?



참고 :

https://blog.naver.com/dove7522/221740905070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30/2016093001428.html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7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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