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35세 무직. 그리고 일에 대한 마음
자기결정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서 말하는 동기를 끌어올리는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의 요소가 모두 충족이 되면 일하는 마음은 언제나 맑음일까? 내 경우에 빗대어 보면, 이론의 내용이 대체로 일리 있었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이론의 세 가지 요인을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크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의 조직개편으로 인해 내가 원하지도 않고 잘할 수 없는 일 즉, 자율성과 유능감을 발휘할 수 없는 일에 배정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잘 해낼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자율성과 유능감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실력을 올리는 데에도 시간적 체력적 한계가 있다. 또한 언제나 자신과 손발이 맞고 마음의 결이 맞는 사람들과 일하고 싶겠지만, 정말 무례하고 자신의 상식에 맞지 않는 사람과 일해 관계성이 바닥을 치는 시간도 존재할 것이다. 이렇게 자율성도 유능성도 관계성도 낮을 때면 자연스럽게 일하는 마음의 동기가 바닥을 치게 된다. 그때면 죽상이 되어 일하기 싫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다니든지 상사와 면담하든지 잠시 짧은 휴가를 다녀오던지 등의 노력이 필요할 테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직이나 퇴사를 선택하게 된다. 무엇이 가장 적절한 처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각자가 겪고 있는 문제가 저마다의 부피와 질량으로 모두 다르기에 이렇다 할 만능열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복권 1등에 당첨되거나 나도 모르던 친족이 뜬금없이 내 앞으로 거액의 유산상속을 해주지 않는 한 아마도 나는 다시 일을 찾아서 해야 할 테다. 그 형태가 조직, 개인사업자, 프리랜서, 계약직 등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일의 동기가 항상 높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내게도 좀 더 나은 대처 방안이 필요했다. 일에 동기가 바닥을 칠 때마다 그 일을 그만둠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어떤 문제들은 그것에서부터 일정한 거리가 생겨야 해결 방법이 보이기 마련인데 내게는 일이 꼭 그 경우였다. 일을 떠나 거리가 생기고 나서야 내가 일을 대해야 하는 태도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일을 할 때 내 마음은 이래야겠다는 다짐이 서기 시작했다.
일에 대한 내 마음의 다짐, 그 첫 번째는 버티는 것이다. "뭐야 결국 버티는 거야?"라고 스스로 힘이 빠지는 야유가 나오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야유조차 버팀을 위한 원료로 사용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버티는 것이다. 아기는 첫걸음마를 내딛기 위해 수 없이 넘어짐을 반복하며 버티는 힘을 키운다. 마라톤 메달리스트도 태어나서부터 달린 것은 아니다. 똑같이 일어서기 위해 버티는 유아기를 지나 성장의 과정을 거치며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내 일에 대한 마음의 움직임, 동기도 우선은 버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시작에는 버티는 기간이 있다. 지금 내가 손에 아주 익어있는 일들도 버팀으로 시작했다. 움직임의 측면이 아니라 시간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서 좌절하고 지쳐있을 때도 버텨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기쁨의 순간이 찰나이듯 뚜렷이 닥친 시련의 시간 역시 찰나가 될 수 있다. 삶의 잠언이 말하듯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초연한 마음으로 버텨내다 보면 어느 때는 관계성이 회복되고 어느 때는 자율성이 또 유능성이 회복될지 모를 일이다.
두 번째는 일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지난 내 직장생활의 가장 큰 패착이 바로 일과의 거리 두기였다. 퇴사 후 여러 일에 대한 책을 읽다 내 마음을 쏙 빼다 닮은 문단을 발견하여 인용한다.
내 번아웃의 많은 부분이 일을 단순한 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일을 과도하게 사랑했고, 심지어 이 일이 아니고서는 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마치 일생일대의 사랑이 잘 안 풀리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제현주 지음,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어크로스, 2014
정말 표현 그대로라 내가 덧대고 뺄 말이 없다. 필사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더 내 손으로 적자면, "일을 과도하게 사랑했고, 심지어 이 일이 아니고서는 내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마치 일생일대의 사랑이 잘 안 풀리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정말 그랬다. 마치 희대의 팜므파탈(혹은 옴므파탈)에게 매료되어 어쩔 줄 몰라 놀아나는 줄 알면서 간이며 쓸개며 빼다 주는 어리숙한 사랑을 하듯 일을 대했다. 상호 존중과 성장이 있는 건강한 연애가 아니라, 한 방향의 투신하는 사랑인 줄도 몰랐다. 그저 어쩌다 한번 나를 향해 빙긋 웃어주면 거기에 칠렐레팔렐레 온 정신을 뺏겼고, 대부분은 "나는 이렇게 너(일)에게 잘해주는데 너는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는 탄식을 일삼았다. 이제는 그 모습이 나의 어리숙한 사랑이었음을 고백한다. 이제는 일과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함을 안다. 그래서 일 그 자체가 아닌, 일에 어떤 부분이 나를 의미 있게 하는지, 내 마음을 움직이고 실력의 성장을 촉진하는지 조금은 차가운 마음으로 일을 바라봐야 한다.
그냥 일하면 좋은데 그 그냥이 도통 어려운 게 아니다. 무수한 이유와 상황을 헤쳐 나가면 좀 더 단순하고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왜 일을 하냐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김상용 시인의 "南으로 窓을 내겠소"의 구절이 떠오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자연에 대한 수수한 묘사와 함께 유유자적한 풍경을 담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물어본 삶의 이유에 대해 웃음으로 안분지족의 삶을 함축하여 대답한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 내게 왜 일을 하냐 물었을 때 그저 웃음으로 그 대답이 충분했으면 한다. 그 웃음에 내 수많은 발자국이 묻어 나와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왜 일하냐건, 웃지요"하고 어디 유명하지 않은 인터뷰지 모퉁이에라도 내 일에 대한 마음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초연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