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골책방 Nov 10. 2019

페미니즘은 혐오가 아니란다

딸과 함께 '82년생 김지영'을 만났다

'82년생 김지영'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에게 편지를 썼다.


딸에게.     

 너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다정하게 걸어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났어. 그분들이 나를 지나쳐 걸어가는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단다. 두 손을 꼬옥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그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싶었어. 그러다 문득 엄마의 기억 속에 왜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은 없는 걸까 속상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마도 책 속의 김지영 씨를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아.

 엄마는 김지영 씨를 세 번 만났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반응한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고, 다시 읽은 이번에서야 제대로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엄마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깨우쳐주지 않았었거든. 몰랐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거였어.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거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딸이 사는 세상은 엄마의 세상보다 더 나아지길 바라. 그래서 엄마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려고 해. 어쩌면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단다.

 김지영 씨는 평범한 집안의 둘째딸이었어. 김지영 씨의 어머니는 착실하게 시어머니를 모시는 분이셨고. 그런데 어머니는 시어머니가 너무 손자를 바라니까 딸인 것을 알고 혼자 병원에 가서 울며 낙태를 하기도 했대. 그랬으니 김지영 씨가 딸이라서 받았을 설움을 짐작할 수 있지? 점차 남아선호사상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엄마가 결혼했던 당시에도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 엄마도 첫 아이를 가졌을 때 조마조마 했었단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들을 낳아야하는구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던 때였어.

 김지영 씨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할 때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기도 해. 출산과 육아 문제를 겪게 되니 취업 기회도 적을 수밖에 없었지. 맞벌이를 하다가도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는 엄마의 책임으로 맡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엄마도 오빠를 낳기 두 달 전에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두었었어. 회사 일이 바빴던 아빠는 자주 출장을 다녔기에 잔병치레가 많은 오빠를 업고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한 일과 한겨울 새벽에 택시를 못잡아 벌벌 떨다가 울며 응급실에 갔던 일은 오롯이 엄마의 기억에만 살아 있는 일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어.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 아빠에게 미안하다고까지 생각했었지. 미련하게도‘엄마’라는 이름의 값어치는 생각치도 않고 ‘가장’이라는 이름의 무게만 알았던 거야.

 네가 태어난 후에는 엄마의 하루에서 엄마 자신의 존재는 거의 없다시피 했어. 너는 업고 오빠는 안고 장을 보러 갔고,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해야 했어. ‘독박육아’라는 말도 최근에야 알게 된 거야.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고 당연시 했지만 엄마는 그때 우울했었단다. 아니 우울한 줄도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우울했던 거였더라고.

 네가 다섯 살까지 살았던 우리집은 20층이었는데 거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오가는 차들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던 밤도 있었더랬어. 그래서 엄마는 책 속의 김지영 씨가 독박육아로 힘들어 하는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더라. 뿌옇게 먼지가 뒤덮인 거울을 닦고 이제야 나를 보는 기분이었거든. 김지영 씨를 통해 본 엄마의 모습은 사실 좀 부끄러웠어.

 책 속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던 김지영 씨가 ‘맘충’이란 말을 듣는 장면이 있어.   엄마는 같이 일하는 동료와 나눈 이야기 중에 맘충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어. 그 사람은 자주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투덜댔었는데 낮에 백화점 문화센터에 아이를 맡기고 쇼핑하는 맘충이 부럽다고 하더라구. 맘충이라는 말이 썩 듣기 좋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어.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그 말을 뱉은 사람도 나빴지만 듣고도 아무 말하지 않은 엄마도 나빴던 것 같아. 엄마가 좀 더 일찍 김지영 씨를 만났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야. 지금이라면 김지영 씨의 편에 서서 맘충이라는 말에 당당하게 반박하겠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도 여유를 즐길 권리가 있는 거라고. 사람에게 벌레라는 말을 써서는 안되는 거라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 그런데 살아보니까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아. 그중에 남성과 여성, 성(性)구분의 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더구나. 여성은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82년생 김지영’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이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김지영 씨의 엄마가 한 말인데 책을 읽고 나서 엄마도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되었어. 엄마 딸이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막 나대면서 잘 살아내면 좋겠어. 더러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당당하게 맞서는 여성으로 자랐으면 해. 누군가 나서야 한다면  너였으면 좋겠어. 너로 인해 바뀔 수 있는 세상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구나. 엄마의 세상은 아직 덜 바뀌었지만 너의 세상은 더 달라질 것이라 믿고 싶어.

 얼마 전에 생리혈이 묻은 네 속옷을 빨면서 울컥 눈물이 나더라. 엄마 딸도 여성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 그저 평범한 엄마라서 특별하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딸아! 엄마는 너를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해. 페미니즘에 대해 늘 깨어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살 거야.

 명절을 지내고 몸이 찌뿌둥했지만 학원 길이 익숙하지 않은 너를 혼자 보내기가 안타까워서 엄마도 따라나섰지.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손을 꼬옥 잡고 나란히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누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면 그리 보이지 않았을 거야.

 여성과 남성, 두 성(性)이 그렇게 나란히 함께 걷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라고,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책 속의 이야기는 김지영 씨가 상담 치료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단다. 아직도 무수히 많은 우리 시대의 김지영 씨가 살고 있기 때문에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고 말았어. 김지영 씨에게 생긴 병은 엄마의 문제였고 어쩌면 너에게도 일어날 문제일지 몰라. 엄마는 네가 김지영으로 살지 않았으면 해.

 중학생인 네가 책으로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그러니 ‘82년생 김지영’ 영화가 개봉되면 함께 만나러 가자꾸나.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부치지 못한 편지를 카톡으로 보냈다.

그리고... 딸과 함께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 때, 딸아이가 내 손을 가져가 힘주어 잡았다.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딸의 마음이 나에게로 건너왔다.


"엄마,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르는데

사람들이 헐뜯고 욕하는 것들이 무서웠어요..."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일이란다.

그리고 엄마가 편지에 썼듯이 페미니즘은

서로를 헐뜯고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나란히 함께 걷는 거야.

그렇지만 한 가지, 엄마는 내 딸이 싫은 일에 대해서는

당당히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여자 아이는 자라서 김지영

영화 마지막 부분 쯤에 김지영이 펼친 책에서 보여진 글귀이다.


나는...

여자 아이는 자라서 엄마가 되었다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딸을 얻은 엄마로 살아서 행복하다고.

내 딸도 엄마라는 위대한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여자이기에

그 삶을 축복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는

딸 아이의 손을 가져와 가슴에 꼬옥 안아주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신발끈을 묶어 드릴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