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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Dec 24. 2020

선물 같은 날

‘길바닥에 웬 지갑이?’ 별생각 없이 그녀는 지갑을 주워 들었다. 사람이 제법 다니는 길거리인데도 그날따라 주변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갑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했지만 남의 지갑을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때였지만 해 질 녘 바람결은 스산했다. 목을 한껏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파묻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해 가다가 지갑을 주워 든 것이다. 문화센터에서 요리교실을 막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난봄과 여름은 참 힘들게 보냈다. 예기치 않은 암수술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항암치료를 끝내자 곧바로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여름 내내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멀리 서울까지 병원을 오가야 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데 병원은 꼭 시간 맞춰 가야 했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는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야 탈 수 있었다. 어린아이 걷듯 하는 그녀의 걸음으로는 횡단보도를 건너기가 참 힘들었다.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그런데도 신호등은 도중에 빨간색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사정없이 내려쬐는 한낮의 햇살에 달궈진 아스팔트 길은 원망스럽기만 했다. 병원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집에서부터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그런데도 좀 늦기라도 하면 간호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게 싫어 예약시간보다 좀 일찍 가면 또 빨리 왔다고 핀잔이었다. 

날씨가 선선해지면서 방사선 치료는 끝냈지만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온갖 생각에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좀 멀기는 하지만 문화센터 요리교실에 등록을 하기로 했다. 오전, 오후 두 강좌를 신청했다. 결코 가까운 길은 아니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어서 다니기로 했다. 날씨가 선선해졌다고는 해도 온몸은 늘어지기만 했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하루 두 번씩 그 먼 길을 오갔다. 

 지갑을 집어 든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도둑으로 몰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지갑을 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출소에 신고를 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집으로 가서 지갑에 든 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주인을 찾아줄 수만 있다면 직접 찾아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작정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갑에는 주민등록증과 돈 삼천 원, 그리고 십만 원 상품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주민등록증은 지갑 임자가 젊은 여성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갑을 잃고 동동거릴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지갑 속에 든 것들로 봐서는 그녀에게 10만 원은 큰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권에는 뭔가 애틋한 사연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시 빨리 지갑을 잃고 상심하고 있을 그 마음을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막상 그녀의 집을 찾기 위해 나섰지만 그녀의 아파트 단지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없이 아파트 단지를 헤집고 다녔지만 그녀의 아파트 단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저 멀리 임대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마침내 그녀가 살고 있을 아파트 단지를 찾은 것 같았다. 주민등록증 주소로 그녀가 살고 있을 동을 확인하고 경비실 문을 두들겼다. 그녀의 집 호수를 말하며 연락을 부탁하자 경비아저씨는 혹시 지갑을 주웠느냐고 반색을 하며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하자 ‘아 맞군요’ 하며 경비아저씨는 자기 일인 양 반가워했다. 지갑을 잃어버린 그녀가 혹시 누가 지갑을 주워서 가지고 올지도 모른다며 누군가 찾아오면 집을 잘 좀 안내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이었다. 

경비아저씨 연락을 받은 아기 엄마인 듯 한 여성이 금세 달려왔다. 반가움과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처음 보는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자신의 집으로 가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이끌었다. 아니라며, 지금 시간도 늦었고 지갑 주인도 찾았으니 그냥 가야겠다고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집은 좁았다. 남편과 아들, 딸 네 식구가 산다고 했다. 상품권은 얼마 전 그녀의 생일선물로 남편이 준 것이라고 했다. 무엇을 살까 망설이기만 하다가 아까워 쓰지는 못하고 지갑에 넣고만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 상품권이 담긴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느냐고 했다. 남편이 얼마나 어렵게 그 상품권을 마련했을지 잘 안다고 했다. 때문에 남편에게는 미안해서 잃어버렸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너무 속이 상해 언니에게 전화했더니 ‘상품권은 네 것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라. 주운 사람이 누가 그걸 돌려주겠느냐’고 하더라면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끓여오고 사과를 내왔다. 사과는 알이 아주 작았다. 그 자그마한 사과와 좁은 집, 십만 원 권 상품권 하나에 그렇게 좋아하는 아기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싸해왔다.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지요? 앞으로 자주 만나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해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그만 갔다가 다음에 놀러 올게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녁은 드시고 가셔야지요.” 

한사코 붙잡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어렵사리 그녀 집을 나왔다. ‘부디 행복하게 지금처럼 그렇게 오순도순 잘 사세요’ 마음으로 빌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먼 길을 걸어오면서도 힘들지가 않았다.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라고 했다. 그녀가 살던 동네 부근을 지날 때마다 아직까지 그녀가 여기에 살고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알뜰살뜰 살림을 모아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했다. 분명 애틋하고 착한 그 마음씨를 하늘도 버리지 않으셨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참 힘든 때였지만 그 아기 엄마 생각만 하면 지금도 빙긋 빙긋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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