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석 Mar 30. 2023

초등 3년생이 테스를 읽었을 때

 초등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교과서가 아닌 동화책이나 소설책 같은 건 존재조차도 모르던 때였는데 어쩌다가 ‘왕자와 거지’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누군가가 재미있다며 읽어보라고 가져다주었던 것 같다. 당시 시골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고학년조차 책을 읽지 못해 방과 후 학교에 남아서 책 읽기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2학년 교과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는데 ‘왕자와 거지’라는 책은 정말 재미있었다. 동화책은 재미있는 책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고 읽을 동화책은 없었다. 아이가 읽을 동화책뿐 아니라 어른이 읽을 책조차 없었다. 교과서에선가 실려있던 링컨 미국 대통령이 어린 시절 수십 리를 걸어가서 책을 빌려 읽었다는 일화를 깊이 공감했던 시절이었다. 왕자와 거지 같은 그런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었지만 우리 집은 물론 주변 어디에도 읽을 만한 책은 없었다. 아버지가 보시는 한문책이나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이 실린 정부 홍보용 소책자 정도가 아버지 책꽂이에 꽂혀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떻게 구했는지 기억에는 없는데 ‘테스’라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어린이용으로 만든 책이었겠지만 꽤 두꺼운 책이었는데도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테스라는 소설은 어린아이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여주인공 테스가 그토록 사랑하던 약혼자로부터 버림받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테스를 버린 약혼자가 너무 미웠다. 책을 읽고 나서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간이나 버림받은 테스의 모습을 머리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테스의 처지가 너무 가슴 아프고 버림받은 테스가 너무 불쌍했다. 소설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후 소설책이나 동화책은 읽기가 겁이 났다. 일 년에 한두 권 정도 어쩌다 구할 수 있는 책인데도 읽을 자신이 없었다. 그 책이 너무 슬픈 내용이거나 내가 바라는 바대로 끝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책으로부터 상처받지 않으려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결말부터 확인하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결말이 슬프지 않거나 불행하지 않게 끝나는 책에는 상처받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동화책이나 소설책은 어떻게 끝나나부터 확인하고 나서 읽었다. 그 버릇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니 학교도서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이 있었다. 교과서에 등장한 수많은 책을 실제로 보는 것은 경이였고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책을 빌려 읽었다. 그때도 소설책은 끝부분을 확인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내 입맛에 맞는 책만 읽다 보니 학교도서관의 그 많은 책 중 상당수 소설책은 읽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는지 소설책을 편식하는 버릇을 떨칠 수 있었다. 노력의 결과였는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 결말을 확인하지 않고 읽은 책이 비참한 결과였는데도 어릴 때처럼 그렇게 마음 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테스’는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릴 적 ‘테스’를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나 하고 읽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테스를 읽으면 지금도 그렇게 마음이 상처를 입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청소년 시절 정말 재미있게 읽고 가슴 찌르르하게 감동받았던 책을 나이가 들어 다시 읽고 그 유치함에 아주 실망했던 경험이 테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했다.  

도서관에 가서 테스를 빌렸다. 두 권으로 된 상당히 두꺼운 분량이었다. 테스는 어릴 적 기억 속의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여주인공 테스는 결혼식 이전에 약혼자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치르고 첫날밤에 서로를 알기 전의 일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결혼 전 순결하지 못한 일을 남편이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갈등과 그에 따른 분노의 이야기였다. 자신도 과거가 있는 남편이 아내의 과거를 알고 크게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멀리 외국으로 떠나고 둘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테스는 어쩔 수 없이 처녀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힘겨운 노동을 해야 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그럴수록 만나지 못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던 테스는 우여곡절 끝에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지만 이미 테스는 자신의 순결을 빼앗은 남자를 죽이고 쫓기는 처지가 된 뒤였다. 남편과 함께 도망치던 테스는 더이상 도망하지 못하고 끝내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그토록 서로를 그리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도망하고 하는 내용은 어릴 적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을 만났고 그의 사랑을 확인까지 했는데도 왜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어릴 적 읽었던 책에는 서로가 만나는 내용은 없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형수로 죽어가야 했던 테스의 아픈 기억이 서로가 다시 만난 것보다 어린아이에게는 더욱 강렬했었기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이전글 어느 특별한 결혼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