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다정하기보다는 친절한 사람이죠”
듣고도 아무런 반감이 들지 않았다. 곧바로 인정해 버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가 해온 어떤 제스처들이 차가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를 보고 차갑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하지만 내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고개부터 저었다.
친구 중 정말 정이 많은 친구가 있다. 잔정이 많아서 만나면 뭔가 항상 선물을 갖고 왔다.
'어딜 갔는데 네가 생각이 나서 샀어'라며 작은 마스킹테이프나 스티커나 엽서를 주고, 집에서 안 쓰는 물건이라며 뜯지 않은 화장품을 주거나, 작은 과자나 사탕 같은 것을 꺼내줬다. 이야기를 할 때는 적극적으로 공감해 줬다. 나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상상하고 구체화해 가며 흥미진진하게 들어줬고,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다른 친구들과 그 친구를 칭찬하며, ‘그 친구는 참 정이 많아’라고 이야기했다. 그 친구를 보며 나도 다정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럴 수 있는 걸까? 자신의 것을 쉽게 나누는 친구, 그럼 내가 욕심이 많은 걸까? 내가 그 친구 같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언제부턴가 사탕이나 과자를 가방에 넣고 다녔고, 간식을 사면 직장동료와 나눴고, 선크림이나 핸드크림을 나누어 썼다. 돈이 급하다는 친구에게 받지 않을 생각 하며 묻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다. 대화를 나눌 땐 가능한 모든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다정하단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내게 ‘다정하기보다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도 꽤나 다정하여 ‘저도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덧붙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다정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에서 ‘다정함’을 상대방이 느끼고 있을까?
그것을 나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친구들이 내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사람에게 기대를 안 해'
나도 말한다. 난 사람들에게 기대를 안 해.
그래서 실망을 안 해.
나는 당연한 것을 하는 것, 할 수 있으면 하는 것, 대체로 모든 이에게 같은 방법으로 할 것. 가능한 모두를 환대할 것, 단, 나의 선을 넘으면 천천히 정리해 볼 것. 그것들을 가장 깊은 내면에서 반복해 왔다. (이런 면에서는 INFJ가 맞다)
누군가 내게 너무 많이 기대고 선을 넘어 내가 힘들어한 적은 있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너무 기대거나 선을 넘어 부담감을 준 적은 거의 없다.
(있다면 내가 기대는 몇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니 축복으로 알라)
힘들어 찡찡대는 날이면 '너무 찡찡댔죠? 내가 내 말만 너무 많이 했죠?'를 꼭 덧붙인다. 그렇게라도 부담감을 줄여보려고.
아모타 이제 더 이상 내가 나에게 '더 다정하길' 바라는 것은, 내게 가면을 쓰라는 것과 같다. 여태껏 너무 솔직하고 내 기준에 정직했고 늘 진심이었으니까. 그 친구처럼은 어렵고, 딱 나의 정도까지만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다정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나는 다정으로부터 탈락되고 친절을 ‘선택’ 한 것 같다.
‘정’이란 무엇인가…?
한국이 자부심을 갖는 주요 정서 혹은 가‘족’ 주의 같은 것? 오지랖?으로 읽었던 적도 있으나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게 정은 ‘사랑’ 같은 낯간지러운 것이다. 갖고 태어나지 못한, 갖고 태어났으면 좋았을 타인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쉽게 기대하게 되고 쉽게 서운하게 되는 감정상태이고, 또 그것을 표현하기 어려운 솔직한 감정이다. ('서운하다', '눈치', '억울하다'와 같이 번역되기 어려운 감정이다.)
'정'을 갖고 태어나지도 못했지만, 한 명에게 마음이 깊어져서 곱든 밉든 '정'을 갖게 될 때에는 (한 명 도 없거나 겨우 한 명이거나 할 때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면 좋겠고, 내게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고 이뻐해 주면 좋겠고 바라봐줬으면 좋겠고, 내 실수든 뭐든 이해해 줬으면 좋겠고, 기대고 싶다는 '욕심'이 난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도 억울하고 분했다. 아무에게도 감정노동이나 돌봄 노동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돌봄을 요하는 환자였고 환자이거나 환자일 것이므로 더 그렇다.
민폐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떠나는 것이, (민폐를 끼쳐가며) 누군가와 깊게 사랑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일관적이지 못한 사랑에 휘둘려보았고, '누군가'에게만 쏠리는 애정에 외로운 적이 있다. 그래서 늘 일관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일관적이지 못하게 대한다면 그것은 '심리조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기분에 따라 누군가가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난 다정한 사람들의 변덕에 휘둘리고 '왜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하고 울었던 것 같다.
'왜 날 사랑하지 않아'하고 우는 것.
어쩌면 매일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이미 알고 있다.
만약 정이 깊어져 내 맘속에서 원하는 것이 자꾸 생겨날 때,
사랑받고 싶고 기대고 싶을 때,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기대게 되는 것은 너무 무섭다. 잔인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적당히 사랑하고 싶지만'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아플 것이다. 또 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신이 될 수 있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 사랑만 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라는 노래가사처럼,
불가능한 것만을 바라면서 계속 아파하고 파괴될 것이다.
그냥 그렇게 아플 것이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다짐이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좋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기보다는,
혼자 남은 나/우울증에 걸려 매일 우울하고 민폐를 끼칠 나를 상상하며 먼저 외로워지기보다는,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만히 어루만지는 것' 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다짐하면서
그렇게 아플 걸 알면서 사랑할 것이다.
왜냐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