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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리는 첫 선, 마음의 소리 듣기

제대로 그린다는 건 , 진짜 나를 보는 일

by 결 디자이너

선 하나가 나를 깨웠다.

보어아웃이라는 감정 속에서 나는 무기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고,

지지면서도 애썼다.


그런데,

내 감각은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색도, 말도, 표정도,

심지어 내 얼굴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 때 간 곳이

크레이머 미술학교였다.


지우면서 나를 그리다

크레이머 미술학교 거꾸로 드로잉 수업

몇일째 선으로 그리기를 하다가 자화상을 그리는 날이었다.

거울 너머엔 나의 얼굴이 있었고,

테이블 위엔 종이와 4B연필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릴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그려야 할지 몰랐다.

아니, 정말고 '나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몰랐다.


결국, 나는 두 눈을 감고

선 두 줄을 그었다.

무의식처럼, 의무처럼.


아무 감각도 ,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회색빛 선.

그건 살아있는 선이 아니었다.

나조차 느껴지지 않는, 멍한 자기표현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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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정한 선생님이 내 앞에

네모 틀안의 십자 구조를 그려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제, 눈을 뜨고 제대로 보면서 그려보세요."

나는 연필을 들고

그 구조 안에서 다시 시작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방식은 선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네모를 모두 연필로 칠한 뒤 내 얼굴의 밝은 부분을 지워가며

명암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눈동자의 위치,

코끝의 방향,

턱선의 곡선까지

손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감각이 손을 움직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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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은

처음으로 '제대로' 내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내 눈동자는 지금 어떤 모양인가?"

"내 시선은 밖을 향한 건가, 안을 향한 건가?"


지우면서 다시 그리는 그 과정에서

내 안의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한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내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


그 모든 말들이

지우개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나는 단지 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도화지 위에 완성된 자화상은

깊은 파랑의 물결 위에

황금빛이 번쩍이는 느낌이었다.

정말로 나를 닮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얼굴.

그림이 아니라

'존재로 그려진 나'였다.


모두가 놀랐다. 나도, 선생님도, 수강생들도.

내 안에 이런 재능이 있었는지

나조차 처음 발견한 나의 가능성.


그건 단지 그림을 잘 그린 경험'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바뀌는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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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나가 나를 깨웠다.

그리고 그 선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줬다.



정한 선생님께

정한 선생님,
그날 선생님은 저에게 그림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어요.
그보다 먼저
‘어디를 보아야 나를 제대로 그릴 수 있는지’를 묻는 법을 알려주셨죠.

눈을 감은 저에게
“이젠 제대로 보세요”라고 말해주신 그 순간,
저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응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네모 틀과 십자 구조라는
아주 단순하고 정직한 도구를 통해
선으로 삶을 들여다보는 감각을 이끌어주신 선생님.

그날 저의 자화상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그림을 믿고 바라봐주신 선생님의 눈빛이었어요.

감사합니다.
선 하나가 나를 깨웠고,
그 깨움은 선생님의 질문과 격려라는
제3의 손이 이끌어준 기적이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를 잘 보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리고 그날,

저는 제 얼굴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저를 보았습니다.



지우면서 나를 그리다’ – 나의 첫 자화상

준비물: A4 도화지 한 장, 4B 연필 하나, 작은 손거울 또는 스마트폰 전면 카메라


도화지 위에 네모 틀과 십자 구조를 연필로 가볍게 그려주세요.


눈을 감고,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첫 선을 그어보세요.


눈을 뜨고, 지금의 시선으로 내 얼굴을 따라 그려보세요.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내 손이 나를 알아가는 감각을 느껴보세요.


“그림은 결과가 아니라 감각이에요.
그 선 하나가,
지금의 나를 다시 말해줄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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