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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어아웃, 낯선 감정 앞에 멈추다

퇴색된 나에게 말을 걸다

by 결 디자이너

퇴색된 나에게 말을 걸다


: 나는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었지만,

어느 날 내 안의 색이 바래졌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은 그 퇴색된 나를 다시 그리는 이야기다.



보어아웃, 낯선 감정 앞에 멈추다

"잘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텅 빈 마음이 들까?"

스무해를 한 방향으로 달려왔다.

누군가의 브랜드가 될 옷의 질감과 색채를 설계했다.

그 일은 나의 전부'였다.

일을 사랑했고, 잘했고, 열정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어느 날 나는 지하방의 냄새 같은 감정 속에서 눈을 떴다.

새벽 5시.

눈을 뜨자마자 나는 '존재하지 않는 냄새'를 맡았다.

밖은 여전히 태양이 떠오르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된 감정의 곰팡이 냄새가 조금씩 번져온다.

어디에도 없는데, 그런데 확실히 어딘가에서 풍기는 쓰레기 냄새.

지하방 특유의 눅눅한 공기,

습기 찬 벽지 냄새,

마치 나도 그 안에서 오래된 감정처럼 썩어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그때야 알게 된다.


'보어아웃(Bore-out)'

이건 지루함이 아니라. 내 삶에서 나 자신이 사라지는 중이라는 걸.


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무기력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잘하고 있었고, 여전히 바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와 내 감정 사이에 두꺼운 유리가 끼워진 것처럼

삶이 멀게만 느껴졌다.


지루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나와 연결되지 않은 느낌,

잘하고 있음에도

내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데,

'살아 있는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상하게 낯설고,

묘하게 서늘한 감정 앞에서 나는 멈춰섰다.


나는 자기다움을 모르고 산 게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자기답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색을 고르고, 트렌드를 만들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짜 맞추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나의 손끝으로 세계를 빚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색을 다루는 손끝이 설레지 않았고,

감각을 짜는 일이 나를 살아있게 하지 못했다.


왜 더 이상 나를 들뜨게 하지 못했던 걸까?

'나답게 살아가는 것'과

'나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는 삶'은

같은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이고,

무엇이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멈췄다.

그리고 멈춘 그 자리에서

조용히 한 줄 선을 그어보았다.


선은 삐뚤고,

완성된 그림은 없었지만

그 안에는 아주 오래된 나의 감각이 숨 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다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오늘 아침의 감정을 그려보세요.

당신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느낌은 무엇이었나요/

그 감정을 색이나 선으로 표현해보세요.

그 감정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나요?

냄새였나요? 소리였나요? 빛이였나요?


"지금 내가 어떤 색인지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늘 아침의 나를 그려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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