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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색을 잃어버린 순간

by 결 디자이너

퇴사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출근하지 않는 아침이 낯설었다. 어제와 같은 집, 같은 침대, 같은 하늘인데도 마치 다른 차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출근길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무심히 움직이는 자동차들.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기지개를 켜고 핸드폰을 들었다.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는데,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불을 다시 덮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이제 뭐 하지?"


사람들은 출근하는데,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회사에서는 온갖 자료를 정리하면서도, 막상 나의 하루를 설계하는 건 이렇게 어려웠다. 전날 먹다 남은 우유, 한 귀퉁이가 살짝 검게 변한 바나나.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문을 닫았다. 오늘은 배가 고픈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제 ‘어떤 하루’를 살아야 할까? 아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퇴사 후, 나는 길을 잃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같은 질문은 퇴근 후 넷플릭스를 켜는 순간 잊혔다. 하지만 퇴사 후, 나를 설명하는 말이 사라졌다. 나는 직장인도 아니고, 프리랜서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바쁘게 타이핑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미팅을 하고, 누군가는 무언가를 열심히 계획하는데, 나는 인터넷 창을 띄운 채, ‘퇴사 후 뭐 하지?’ 같은 검색어만 입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껴야 할 시간인데, 나는 왜 이토록 초조하고 불안할까?

색을 잃은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직업이라는 색을 덧입고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일이 나를 규정하고, 나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 색이 벗겨지고 나니, 나는 텅 빈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제, 다시 색을 칠해야겠지.

나는 어떤 색이었을까. 어떤 색을 좋아했더라. 무엇이 나를 설레게 하고, 무엇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지. 직함이 아니라, 진짜 나의 색을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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