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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다 Mar 31. 2020

위로의 기술

네가 듣고 싶은 말

위로의 기술에 점수를 매긴다면 나는 하(下)점을 받을 것이다. 나는 남에게 위로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 내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에도 미숙했다. 어쩐지 슬프거나 우울한 날에는 차라리 혼자가 되는 편이 나았다. 스스로 다독이고 털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유법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나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나는 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보다는 듣는 쪽이 편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러는 나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구나 착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어


속상한 일이 있다던 친구와 만난 날이었다. 내가 이 말을 들은 것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서로 상한 감정으로 헤어져 집에 돌아와 그 친구와 나눈 말들을 떠올려봤다.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생긴 친구에게 네가 백 번 잘못한 일이라고 다그쳤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으로 친구를 가르쳤다. 평소 같았으면 애써 조언을 해주는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지, 친구를 탓했겠지만 그날은 힘없이 말하는 친구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어. 나는 위로는커녕, 잘 들어주지도 못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같은 상황이 생기면 불쑥,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꾹 참는 쪽을 택했다. 그날 친구의 말이 내게 꽤나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종종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두고 제 스스로 씨름하느라 상대의 이야기를 놓치곤 했다. 만남 후에는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더라,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최악의 말 상대는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모임에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의 규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외의 다른 이들은 절대로 어떤 반응이나 호응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귀만 열어두는 것, 그러니까 잘 들어주기만 하는 것, 딱 한 가지 규칙이었다. 당연히 나도 내 차례도 돌아왔다. 처음엔 의심이 있었다. 이것이 어떤 도움이 될까 싶었으니까. 나는 입을 떼는 데까지도 한참이나 걸렸고, 말하는 내내 듣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내가 말하는 문장과 문장의 사이가 얼마큼 벌어지더라도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도 그에 대한 어떤 평가나 조언 같은 건 없었다. 고요한 모임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깊은 곳의 이야기들을 꺼냈다. 나 또한 그랬다. 위로는 알아채지 못한 새 스며드는 것이었다. 위로는 고요 속에 있었다. 위로는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위로는 말없는 청중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듣는 방법을 배웠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듣기'는 어렵다. 마음을 내 쪽이 아니라 당신 쪽에 두어야 하는 일이라 그렇다. 당신이 되어보는 일, 당신이 문제가 있다고 말할 때 그런 당신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는 일이라 그렇다.

-박연준, 모월모일(某月某日) 중



혼자인 채로, 스스로 털어내고 일어서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정말 감당하지 못한 일들은 이겨낸 것이 아니라 마음 한편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내가 아니면 내 마음은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날 친구가 듣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오래도록 생각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듣고 싶었던 말이 있던 것이 아니라, 잘 들어주기를 바랐던 거라고. 이제와 말한다. 마음을 네 쪽에 두지 못해, 네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다가올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되어보겠다. 내 마음을 온전히 당신 쪽에 두어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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