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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Apr 23. 2024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 음악으로 쓰는 에세이(15)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좋은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다. 사랑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대상이 누구인지 간에 사랑이 쉬운 일이라면, 그래서 사랑의 가치가 떨어진다면(이렇게 말하는 내가 정말 실없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벌써 빛을 잃었을 것이다. 내 말이 너무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랑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논지를 단순화하기 위해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할 경우 어려움은 더해진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가사의 유행가도 있지 않은가. 사랑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사랑으로 인한 번민으로 폭음의 나날을 보내 본 사람에게는 이 유행가 가사가 어떤 선현의 가르침보다도 진리로 다가온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고금의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사랑의 아픔과 비극적 결말을 주제로 다루어 왔다. 그리고 그 아픔이 크면 클수록 독자들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독자가 문학 작품에 공감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와 같은 공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문학 작품 속 사랑의 경험을 공유한 경우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문학 작품 속의 사랑을 마음으로 갈망하는 경우다. 아마도 우리의 공감력은 이 두 가지 경우가 혼재된 상태에서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문학 작품이 그리는 사랑처럼 이상적인 사랑이 되지 못한다. 많은 경우 서로 타인인 두 남녀 간의 사랑은 섣불리 지속할 동력을 잃고 시큰둥해지기도 하고, 사랑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현실적인 타협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문학 작품 속의 사랑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하는, 비극적인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매료되는 이유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절절함과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완결성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찬송가의 가사처럼 ‘완전한 사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은 지질하게 생각되겠지만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 가사에 어울리게 된다.


 그래도 우리에게 사랑은 찾아온다. 스쳐가는 바람처럼 불현듯 왔다 아쉬움을 남기고 떠나가기도 한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찾아와 완전하지 않은 사랑을 나누다가 종국에도 불완전할지언정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퇴색하지 않는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무리하게도 완전한 사랑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이 사실 완전한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사랑장이라고 일컫는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2장에 완전한 사랑이 적절하게 언급되어 있다. 구구절절이 옳고 공감이 가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런 사랑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불완전을 이유로 든다면 너무 뻔한 말이다. 사랑장에서 서술한 사랑의 예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집착을 들 수 있겠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혈육 간의 사랑 모두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망가진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사랑의 척도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영혼의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어야 한다. 마음에 덧씌워진 집착의 그늘을 걷어내면 사랑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리라 믿는다. 물론 집착을 제거한 사랑이 덜 뜨겁고 덜 간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있어 서로에게 전해지는 마음의 파동, 놀라운 떨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석가모니가 사리자에게 설파한 반야심경의 진리, 지혜로운 삶이 그렇다.

 우리, 지혜로운 사람이기 위해서는 사랑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집착이 아니라면 사랑할 대상이 많아도 좋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 구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즉 사랑은 너와 나의 해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참 좋은 말이다. 이 말은 독일의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원래는 ‘오 사랑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한‘로 시작하는 시)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시인의 시를 어떻게 알겠는가. 낭만주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이 시에 선율을 붙여 노래를 작곡하지 않았다면 독일어에 친숙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리스트는 서로 다른 사랑의 모습을 내용으로 한 세 곡의 리트(독일 가곡)를 묶은 가곡집을 작곡했다. 가곡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그 세 번째 곡이다. 이 가곡집은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 ‘사랑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악보를 출판하기도 했다. 사실 가곡으로 보다는 피아노 독주곡이 더 유명하고 그중에서도 세 번째 곡인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가 가장 유명하다. 이 곡을 들으면 “아, 이 선율!”하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리스트는 소문난 바람둥이로 특히 유부녀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염문은 당대의 소문난 화제였다. 리스트의 불륜을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리스트가 어떤 생각으로 이 곡을 작곡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말에 리스트의 불륜 행각보다는 보다 숭고하게 사랑을 생각하고 음악을 듣는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이 말이 주는 설렘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리스트의 리트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리스트의 ‘사랑의 꿈’ 중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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