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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Nov 02. 2023

어쩌다 보니 그 회사

나도 이 회사에서, 이렇게 일하고 있을 줄 몰랐지

"어떻게 그 회사를 갈 생각을 했어?"


두 개의 오퍼 중에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어봤다. 대학교 내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외국계 전략 컨설팅을 뒤로하고 내린 결정이었으니 더더욱 의아했겠다.


"1년이라도 젊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경험해야 할 것 같아서."


무심한 척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좀 우쭐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더 유명하고, 조금이라도 연봉이 더 높은 대기업을 가려고 노력할 때 나는 뭔가 특별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나오는 연사들이 말하는 청춘이 이제 막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뒤돌아보면 그때 선택의 배경에는 콤플렉스가 7할이었다.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외국계 전략 컨설팅이 아닌, 그 업계 1위인 'M'사였다. 돈 많이 주고 간지 나는 업계에서 가장 돈 많이 주고 간지 나는 1위 회사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M'사가 아닌 다른 컨설팅 회사에서 오퍼를 받았을 때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25살의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외국계 컨설팅 대기업 오퍼를 거절하고 20명 채 안 되는 회사를 입사하는 것은 꽤나 있어"보이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명문대를 자퇴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의 발톱 정도는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이런 주제넘은 자만심을 인정할 용기도, 배포도 없는, 자존감이 간장 종지만 한 그런 아이였다. 모두 지금 와서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래도 3할은 진심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Doing Good Better (한국 번역서 제목: 냉정한 이타주의자)≫를 읽고 꼭 사회적으로 부가가치를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외국계 컨설팅, 투자은행 등에서 인턴을 1년 가까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영리 단체와 임팩트 벤처캐피털에서 또 인턴을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비즈니스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커리어를 거쳐 비영리 재단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임원이 되고 싶었다. 그즈음 김용 세계은행 총장 같은 분의 영상을 보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참으로 구체적이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어쨌든 나쁘지 않은 피봇(Pivot)이었다. 인턴을 하다 정규직 오퍼를 받은 임팩트 벤처캐피털은 사회적, 환경적 가치가 있는 스타트업이 더 빠르고 견고하게 성장할 수 있게 투자와 지원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회사의 대표님은 그간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생기면서 기사에서 봐왔던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 회사에서는 내가 컨설팅을 거쳐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 그러니까 똑똑하고 전략적으로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회사를 잘 다녔습니다.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무랄 게 없는 회사였다. 상사는 따뜻하다 못해 귀인이었고 나를 일적으로, 심리적으로 알뜰살뜰하게 살펴주셨다. 회사에는 또라이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데, 왜인지 그 회사에는 또라이가 없었다. 모두 예뻐해 주셨고, 칭찬해 주셨고, 인정해 주셨다. 내 경력대비 많은 권한과 기회를 주셨다. 워라밸은 원래 따지지 않는 성격이라 상관이 없었지만 업무 시간도 굉장히 유연했고, 복지도 탄탄했고, 휴가도 넉넉했다. 어느 날 갑자기 숙취로 당일 연차를 내도 눈치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너무 출근하기 싫었다. 다들 출근이 싫다고 하지만 좀 심하다고 느꼈다. 다들 이 정도로 싫은데도 그냥 다닌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 심리 상담도 다녔다. 그러시군요, 일이 잘 안 맞으시는군요. 본인에게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닐까요? 나도 아는 이야기였고, 크게 도움 받지 못했다.


안 맞는 일이긴 했다. 나는 낯선 사람 만나는 걸 정말 싫어한다. 인정 욕구가 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고, 나를 똑똑한 사람으로 여겼으면 좋겠다는 강박이 있다. 이상하다는 것도 알고,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조금씩 마음을 바꿔먹고 있으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투자 일은 매일 낯선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이었다. 명함 한 통을 새로 주문하면 두 달 후에 소진되었다. 서로에게 부탁하고 도움 받는 것은 민폐가 아니라 전략이었다. 바쁜 식당에 가면 번거울 까봐 물 달라는 말도 잘 안 하는 내가, 매일 같이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했다. 도움을 주는 입장이고 싶었지만 사회 경험도, 네트워크도 없는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경력직으로 이직하는 산업인지라 기댈 수 있는 또래가 없었다. 나에게 경력 대비 크게 주어진 권한과 기회가 독으로 느껴졌다. 사막에서 겨우 찾은 오아시스 같은 또래들은 나랑 하는 일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울려야 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사회경험이 적어도 6-7년, 많게는 20년 많은 사람들이었다.


입사 3개월이 지날 즈음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누군가에게 해야 하는 전화 한 통, 한 통을 캘린더에 일정으로 적어두었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오기 전, 노트에 시나리오를 적었다. "안녕하세요, OOO 투자심사역 박혜민입니다."로 시작해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토씨까지 적어둔 시나리오였다. 코 막고 쓴 약을 삼키는 아이처럼, 기계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그 상황을 마주할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장에는 ≪미움받을 용기≫, ≪당신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과 같은 책들이 쌓여갔다.


설상가상 모임이 정말 많았다. 내향적이면 그냥 가만히라도 있지. 또 스멀스멀 올라오는 인정 욕구에 말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좋은 사람, 똑똑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할 말을 쥐어짜 내고 광대가 아플 때까지 웃었다. 


업계 지인의 생일파티에 갔던 어느 날, 파티 때 입맛이 없어서 피자 한 조각도 안 먹고 술만 먹다 집에 온 그날, 어김없이 명함을 20장 넘게 소진하고 온 그날, 12시 넘어 집에 도착해서 나는 라면을 끓였다. 가족들이 모두 자고 있는 와중에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조심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서 무슨 맛이 나는 줄도 모르는 채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마음이 말라붙은 호수처럼 공허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한 적도 없는데. 이야기 잘하고 왔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꿀꺽꿀꺽 라면 국물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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