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동안
뭐든 다 할 수 있어! 호기 가득하게 퇴사한 직후였다. 내 나이 만 27살, 하고 싶은 일은 뭐든 시도해 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코딩 혹은 디자인을 배워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투자 일을 하면서 손에 잡히는 실무에 갈증을 느끼던 터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천과 종이로 만들기를 좋아했으니까 코딩이나 디자인도 좋아할 거야. 코딩을 배운 후에는 AI를 배워볼까? 상관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곧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설레기만 했다.
하지만 창업은 아니야. 나는 확신했다. 지금까지 봐온 창업자의 삶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멘탈이 정말 강해야 할 것 같은데, 집에서 내 별명이 바로 "유리 멘탈"이었다. 그러니 창업은 절대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무엇을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누군가 혁신은 이불을 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그게 혁신이었는지, 변화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여하튼 중요한 것이었다. 며칠간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를 판판하고 깨끗하게 피고, 향기 미스트까지 착착 뿌렸다. 혁신이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몇 주 후부터는 아침에 조깅을 나갔다. 사실 조깅 하러 간다고 결심하고 나갔지만 9할은 걸었다. 그래도 집 밖으로 나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매일 나가지는 못했다. 하루 나가면 하루 빼먹는 식이었다. 하지만 작은 성취가 중요하다고 했어. 고등학생 시절부터 읽어온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내 마음에 속삭여줬다.
조깅이 지겨워질 때쯤이면 아침 6시 반, 출근 인파로 붐비기 전에 버스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내려서 남산공원을 가기 위해서였다. 인적이 드문, 가파른 길을 따라 남산공원에 도착해서 인증샷도 몇 개 찍었다. 돌담길을 따라 걷자니 서울 아침 전경이 보였다. 이게 바로 미라클모닝? 이부자리를 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종종 가던 샐러드집에서 두유 요거트와 샐러드를 포장해 왔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며, 시간도 많으니 마트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해 먹으라고 했지만 애교 반, 비아냥 반으로 대답했다.
"혹시... 제가 알아서 해도 될까요?"
나는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무턱대고 퇴사까지 결심한 사람이니까. 아마 그 두유 요거트와 샐러드 다 해서 2만 원 조금 안된다는 사실을 알면 아빠는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다. 그래서 가격은 비밀로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조깅하고, 등산하고, 건강하게 먹고. 완전히 브이로그 일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왜냐하면 솔직히 대부분의 시간은 멍을 때리거나 미국 드라마 <오피스>를 보며 지냈기 때문이다. 짐과 팸이 결혼할 때까지만 보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 웃기고 화나고 감동적이고 슬프고 재밌어서 끊을 수가 없었다. 인스타그램도 어마어마하게 봤다. 결혼 준비 때문에 드레스샵을 골라야 하거나, 촬영 스튜디오를 골라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촬영 포즈를 연구해야 한다는 핑계로 보고 또 봤다. 조깅할 때는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인스타그램 볼 때는 어찌나 잘 가던지.
죄책감을 안고 "솔직히"를 붙여가며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모른다.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다.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나 그랬다. 대학을 다닐 때도, 대학을 졸업해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아이러니한 것은,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강박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할 일 목록, 혹은 이번 방학 목표 따위를 노트 빼곡하게 적어놓고 정작 하나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식이었다. 생산적으로 잘 보냈다면 강박을 느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풀어 설명하면 없어 보이는 데 있어 보이게 부르는 방법이 있다. 완벽주의자의 함정. 완벽하게 해내려고 하다보니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름처럼 멋지지 못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목표가 너무 요원해서. 결국 하루가 시작되면 할 일과 목표랑은 상관 없는 일만 주구장창 하다가 하루가 끝나버렸다.
그래서 전 회사 상무님이 같이 일을 해보자 제안했을 때 5분 정도 망설이다 하겠다고 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막 터진 직후, 식량 위기에 대한 글을 기고하는 일이었다. 리서치하고 글 쓰는거야 원래부터 자신 있던 영역이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지 않아도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묘하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도, 적게 잡아먹지도 않아서 쉬는 느낌이 안 들었다. 나는 지금 쉬고 있는 게 맞을까? 아니면 더 열심히 진로를 탐색해야 하나? 하지만 리서치와 집필이 끝나면 <오피스>도 봐야하고 인스타그램도 봐야해서 코딩을 배우거나 디자인을 배울 틈이 없었다. 그니까 내말은, 그냥 게으르게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말이다.
어느새 남산공원을 걷는 날이면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이 보였다. 돌담길을 따라 걸어 내려오면 남산 경사를 따라 놓여있는 4차선 도로 양옆에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끝없는 행렬을 이루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강렬한 색깔과는 다르게 보면 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치였다. 이따금씩 남산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가을이었다. 계절은 바뀌었지만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