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아빠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빠는 태어나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은 계속 진화한다. 그래서 지금의 감정이 한 번 더 변화를 겪기 전에 한 번쯤은 아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그건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테니까.
박완수씨. 1960년생. 베이비붐 시대 말미, 가난한 양장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 시골에서 양장점을 하는 집은 가난하기 어려웠지만, 완수 씨의 아버지는 그 일을 해냈다. 쌀을 찾아보기 어려운 꽁보리밥으로 식사를 해결했고, 그릇을 싹싹 비워도 허기가 차지 않는 양이었다.
완수 씨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밝았다. 가난한 양장점 아내인 할머니는 막내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너는 공부 외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라고 누누이 이야기 했다. 완수 씨는 졸려도 잠들지 않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마셔서 틈틈이 변소에 가고, 추운 겨울날 실외에서 공부했다. 형들은 이른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러 다녔으니, 이 집안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이 뿐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원하는 회사에 입사를 한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주문처럼 되뇌어온 미래, 완수 씨가 집안을 일으키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완수 씨는 들어온 월급의 아주 조금만 자신을 위해 쓰고, 그 외에는 모두 어머니께 헌납했다. 가족의 희생 위에 선 인생이니, 당연한 처사라고 여겼다. 열심히, 또 열심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다녔다. 덕분에 나라 사정이 어렵던 ‘98년, 회사에 공을 세워 종이 신문에 이름 석자를 올리기도 하고, 중국으로 주재원을 나가 나이 대비 중요한 직책들을 역임했다.
그 와중에 완수 씨가 스트레스에 아주 취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일을 꼼꼼하게 해내고, 주어진 기준에 최선을 다 하는 엄격한 성정 때문에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결국 회사를 다닌지 20년이 되던 해, 완수 씨는 그토록 열망하던 회사의 직장을 때려치운다.
몰랐다. 그 선택이 오래도록 해소되지 않을 인생의 가장 큰 절망으로 돌아올줄. 회사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10이라면 회사 밖에서는 천, 만, 아니 끝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때마다 완수 씨의 가슴 속에는 문장 하나가 쓰여지고 또 쓰여졌다.
‘내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고등학교 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좋던 내가, 덕분에 좋은 대학에 가서 대한민국 가장 좋은 대기업을 20년이나 다닌 내가. 이러고 있다니. 회사 밖에서 시작한 사업 마저 10여년을 이어가다 정리하게 되었을 때, 완수 씨는 한 동안 마음이 매우 아팠다. 단순한 슬픔이 아닌 지속되는 우울이었다. 당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지켜보는 가족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완수 씨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족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신 완수 씨는 아들과 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딸과 오랜 기간 이어질 전쟁의 서막이었다. 좋은 게 좋은거지 하는 아들과 달리 딸은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완수 씨는 자주 격언을 만들어내고는 하는데, 성과와 성취를 종용하며 말했다.
“남들만큼만 하면 도태된다. 남들이 하는 정도는 사회의 평균에 지나지 않아.”
그럴 때면 딸은 눈물을 흘리고 악을 썼다. 완수 씨의 격언들이 지독히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 딸이 나다. 겨울날 실외에서 공부하던 완수씨처럼, 잠을 깨우기 위해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나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타인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완수 씨는 아이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 전쟁은 하루 아침에 끝날 수 없는 질긴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취직 때문에, 취직 해서는 커리어 계발 때문에, 우리는 부딪히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골라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견고할줄만 알았던 미움이 언젠가부터 말랑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사회생활 경력이 1년에서 2년, 2년에서 3년으로 차츰 길어지자 완수 씨에게 품은 감정은 놀랍게도 존경이었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장소로 간다는 것. 이 간단한 매일의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완수 씨 젊은 시절에는 평일에 새벽까지 회식을 하고도 다음 날 아침 7-8시까지 출근을 했다고 하는데, 이 일상을 20년 넘게 이어갔다니. 완수 씨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매일 아침 다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완수 씨에게 마음의 존경을 표했다. 무뚝뚝한 딸이니 말이나 글로 표하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애교였다. 사무실에 앉아 시간을 채우는 일에 비하면. 이렇게까지 할 일이 없나 싶을 때도 있었고, 왜 이게 안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될 때도 있었고, 왜 저렇게 하는건지 이해가 안될 때도 있었다. 소심한 성정 탓에 말은 못하고 꾸역꾸역 일을 하면서도 짜증이 났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 순간이 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어떤 말이 새겨졌다.
‘내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사회인으로 살아가던 어느날이 되어서야 완수 씨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다. 현실이 지독히도 불만족스러운 느낌.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느낌. 그럼에도 이 현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더 나은 현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는, 막막한 느낌.
그래서였을까. 완수 씨가 아는 성공 방정식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 밖에 없어서. 만족스럽지 않은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으로, 완수 씨가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라도 이루었으면 하는 조바심으로. 우리를 다그쳤던걸까. 어째서인지 완수 씨에게는 엄마 경옥 씨에게 느끼지 못하는 애틋함을 느낀다. 부녀가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실제로 자주 그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해서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