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관계

스물여덟의 끝자락

by Yimhyehwa




우리는, 다른 것 하나 필요 없이 둘 만으로도 충분했던 적이 많았다. 서로를 안 봐도 괜찮은 날도 있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더 편하게 느껴진 날도 았다. 서로에게 못 할 말로 주저앉게 만들었던 장면들은 셀 수 없었다. 그럴수록 팽팽했던 인연의 끈이 닳고 해졌지만 다시 꿔 매 거나 붙들며 놓지 않으려 했다. 나도 당신도 끝맺음 뒤에 찾아올 잔인한 말로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나는, 어느샌가부터 당신이란 존재와 당신과의 관계가 무서웠다. 당신과 이어진 삶도, 끊어진 삶도 선택할 수 없었다. 당신은 세차게 말해왔다. 나와 헤어지면 그걸 이유로 생을 끝낼 것이고, 너는 그 죄의 굴레에 갇혀 평생 힘들게 살아보라 했다.


덤덤려 애썼지만, 나를 검열하고 돌아보며 살았다. 혹시 어느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껴진 불편함이나 내가 모를 의심이 당신 마음에 싹튼 건 아닌가 싶어 우리 사이에 겹친 관계들을 모두 정리했다. 또 당신의 마음을, 당신이 건넨 말들을 잘 헤아리지 못한 탓일까 싶어 우리 대화에서 당신이 했던 말들을 기억하고 글로 옮겨 적고는 이유를 찾아댔다. 그럼에도 나는 갈피를 못 잡고 미안하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 겁쟁이였다. 당신은 그런 나를 다그치며 집요하게 몰아붙였고 끝내는 를 격추시키는 미운 사람이었다.


생각해 , 당신이 한 건 내가 줄 수 있는 것 너머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심해의 어두컴컴한 곳마저 빛으로 밝혀 줄 수 있는 용기와 온기를 품는 일이었다.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당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힘들어했던 날, 집에 가서 위로해 주겠다던 나는 때마침 늦게 왔던 날, 감정을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몸을 떨다 창문에 여러 번 머리를 박고는 눈물을 쏟는 너를 보며 무슨 영문인지 몰라 넋을 잃고 같이 울던 나였다. 신의 눈물을 닦고 안아줄 생각도 못한 채 떨면서 쥐고 있던 칼의 방향이 나로 향할까 두려워 다가가지 못했다. 당신은 이대로 잠들어 깨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나는 자고 나면 조금 나아질 거라 말했다. 그 순간에도 당신의 마음에 검게 타들어간 불안의 불씨를 살피지 못하고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애쓰는 비루한 사람만이 남았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집 밖을 잘 못 나가셨던 엄마, 그런 엄마를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고 자기 인생만 살았던 아버지 밑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당신은 불쑥불쑥 올라오는 뒤틀린 감정에 잡아 먹혀 언제가 자신도 그 불행을 되풀이할 것만 같다고 말했다.


나는 같이 이겨내고 소소한 행복을 리며 살자고 말했지만 신의 감정선이 무너질 때마다 똑같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자신과 있으면 불행을 나눠 가지게 될 거라는 경고에도 사랑의 힘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한 남자는 비난과 원성을 섞어 앙갚음했고, 그 시절로 돌아가라 몰아세우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한쪽은 불안을, 다른 한쪽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 애쓰다 주워 담지도 못할 8년의 세월이 지났다. 당신은 원하는 곳에 취업을 했고,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며 자연스레 평온을 찾았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고, 새로운 세계에서 소속을 갖고 사람들을 사귀면서 말도 많아지고 웃음도 많아졌다.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갔고, 혼자 있기에는 넓어 보이는 공간은 아늑히 당신의 마음을 채워주는 안식처가 되었다. 나의 세계 안에서 시들고 병들었던 당신은 나의 세계 밖에서 빛나고 있었고, 내가 그곳에 있을 이유도 자격도 없졌다.


당신의 기억 속에 우리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당신은 우리가 서로를 안아 주며 미안했다고, 고마웠다고 인사를 나누던 그때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자주 가던 서점으로 향하던 길에도 우연히 너를 았다. 나는 당신만이 사라진 예전의 공간에서 같은 모습의 계절을 담으며 몇 해를 더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