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우체통

by Yimhyehwa





혹시 여기를 아시나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악산로 267,

바로 '북악팔각정'이에요.


내려다보이는 야경과 시원한 밤공기에 넋을 놓고 있으면 고되었던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팔각정을 둘러싼 동그랗고 좁은 산책로를 걷고 있으면 서로에 대한 가까움과 편안함이 더해져 보통의 시간을 특별히 만들고 우리의 기억에 여운을 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낮보단 밤이, 혼자보다는 둘이 어울린답니다.


팔각정에는 녹색의 작은 우체통과 빨간색의 큰 우체통이 놓여 있어요. 신기한 건 당장 편지를 넣더라도 6개월 아니면 1년 뒤에 받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거예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요즘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서, '느린 우체통'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팔각정에 올 때마다 편지를 부치는 상상을 해요.

빨간 우체통에는 정말 싫어했던 사람에게, 한 통.

녹색 우체통에는 정말 미안했던 사람에게, 한 통.


정말 싫어했던 사람에게 이 편지는 느리게 가기를 바랐어요. 편지가 닿기까지 그 사람을 싫어했던 이유가 사라질 수도 있고, 나의 부족함이 채워져 그 사람의 못된 마음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찾아와 내가 정말 미안했다며 사과할 수도 있고, 싫어하는 마음이 의지가 되어 벌인 나의 복수가 통쾌한 결말을 내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정말 미워했던 사람에게도 느린 편지를 부치고 싶었어요. 상처만 남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또 다른 아픔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이제야 알게 된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당신을 흠집 냈던 이기적인 나를 인정하고 싶었어요. 그 마음이 닿는 길이 오래 걸릴수록 나를 향한 마음의 벽이 얇아지고 진심의 깊이가 더해질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러다 결국, 한 통도 부치지 못했습니다.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는 언제고, 돌아서면 금방 잊었다가 성가신 일들에 부딪힐 때면 불쑥 우체통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 때 지난날에 빠져들어 지금의 불행을 과거의 어느 때와 겹쳐보고, 얽매인 감정을 풀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내가 있었습니다.


느린 우체통에 부치려던 편지들은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미안함을 전하려던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살고 있지 못한 내 인생을 마치 당신들 탓이라며 원망하려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느린 우체통을 보며 편지를 부치는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빨간 우체통을 한 번, 녹색 우체통을 두 번 쓰다듬습니다.


정말 싫어했던 사람아,

당신이 뭐라던 나는 잘 살고 있어.

정말 미안했던 사람아,

당신에게 준 상처만큼 돌려받는 아픔의 시간을 달게 받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