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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Jul 28. 2022

완벽한 수박밭은 없다

"나 밥 못 먹겠어 엄마. 그냥 갈게."

아들이 아침 식사를 마다하고 집을 나섰다. 식사를 거르고 등교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서 그런지 아침밥 없이 시작되는 하루를  견뎌했다. 어느 날인가 아침에 밥이 없어서 빵을 먹여 보내려고 했더니 밥도  차려준다며 울었다. 정말로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면 편의점 삼각김밥이라도 사다 먹여야 했다. 심지어 좋아하는 반찬이었는데도 한술도  뜨고 나가다니 웬일일까. 나중에 알았지만 여자 친구에게 차여서, 도저히 먹을  없어서 그랬단다.​


아들은 첫눈에 반한 여자 친구를 몇 달간 짝사랑했다. 겨우 마음이 받아들여졌고, 사귀는 동안 열과 성을 다한 모양이다. 우리 집은 추가 용돈은 잘 주지 않는데 연애를 하다 보니 돈이 부족할 것은 뻔한 일, 나는 남편과 딸 몰래 용돈을 여러 번 챙겨 주었다. 하지만 아들의 연애는 끝이 났다. 상당히 배반적인 이유였다. 다른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나,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나 뭐라나. 겨우 고1인 아들은, 연애 다운 연애가 처음인 아들은, 짝사랑에 성공해 좋아하던 아들은 상처를 입었다. 내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나는 혼자 구시렁댔다.



그래도 이삼일 지나니 괜찮아졌다. 식사량은 줄었지만 되도록 아침은 챙겨 먹었다. 여드름 치료를 다시 받는다는 둥, 성형을 하고 싶다는 둥의 자기 비하 섞인 소망도 이삼일 했었다. 반응할 건 반응하고 노코멘트할 건 그리해가며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상처도 입어봐야 성장하지 생각하면서도 우울해하는 아들을 보며 국으로 가만히 있기 뭣해서 아들 편에 서서 험담도 해주고 그랬다. 헤어졌지만 험담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자식 멋있네' 생각도 했다. 더 좋은 여자 친구 만날 수 있다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귀여워서 웃음도 났다.



그런데 며칠 후 아들은 도로 신바람이 났다. 여자 친구가 다시 만나자고 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전의 배신은 싹 잊고 팔불출인 아들을 보니 기가 막혔다. 남편도 아들에게 '너는 밸도 없냐'라고 놀렸지만 아들은 마냥 신났다. 또 며칠을 내리 여자 친구를 만나 이곳저곳 쏘다녔다. 용돈이 또 턱없이 부족해졌다. 그래, 울상에 죽상보단 낫다 생각하며 또 응원해 주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들의 전 여자 친구였다가 다시 여자 친구가 된 그 학생이 현재 자퇴를 고민하고 있으며, 부모님의 불화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해 있고, 새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서 집을 나올 예정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그 문제에 대하여 나와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길 원했다.



아들은 순진했다. 엄마에게 그걸 말하는 순간, 엄마가 어떤 심리 상태가 될지 예상치 못했다. 나는 그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퇴를 계획 중이라는 친구, 가출을 해 친구네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친구, 가끔은 모텔에서 잔다는 친구와 사귄다는 내 아들에게 마냥 '그래, 네 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너는 주체적인 청소년 아니냐,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곧장 얼굴이 사색이 돼서, 실수하고 말았다.



"그런 애를 꼭 만나야겠어?"



그런 애라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말해 놓고 바로 후회했다. 아들의 얼굴에 차가운 냉소와 배신감이 서늘하게 스쳤다. 엄마가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내 말을 들어준다 했다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아, 됐어. 괜히 말했어!" 하고 일어서는 아들의 등 뒤에 아무리 그래도 가출 청소년을 만나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그런 애가 너한테 그리 심한 상처를 준 거냐고, 아니 딴 남자 좋다던 애를 왜 사귀냐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부었다. 아들 방 문은 꽝하고 닫혔다. 나는 그대로 눈물을 쏟았다.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뭐 때문에.


그림책,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앙통의 수박 밭에는 잘 익은 수박들이 일렬로 서 있다. 앙통은 성실한 농부다. 알고 있는 지식과 가진 힘을 총동원해 매끈한 수박들을 깔끔하게 배치해 두었다. 고마운 수박들이 농부 앙통의 입맛에 맞게 잘 도열해 있었다. 근사했다.


어느 날 수박 하나가 없어졌다. 수많은 수박 중에 딱 하나 사라졌다. 앙통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때부터 앙통의 마음엔 지옥이 시작됐다. 남아 있는 수많은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사라진 수박만 애달파 그 자리에 서성이며 어쩔 줄 몰랐다. 만족도 감사도 때려치웠다.  돌아오지 못하는 수박에 집착하느라 남은 것에 대해서 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앙통이 되었다. 아들을 도둑맞은 느낌이기도 했고, 도둑이 아들이기도 했다. 나의 평화, 안식, 소중한 것을 앗아간 게 바로 아들이었으니까.

공부와 담을 쌓고 기어이 특성화 고등학교에 갔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기술을 배우는 특성화 고등학교가 오히려 전도유망하다고 말하는 것에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심사가 뒤틀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전도유망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하는 친구들에 국한된다. '열심'을 잃어버린 학생들에게 특성화 고등학교는 눈치 안 보고 노는 곳이다. 중1인 딸보다 고1인 아들이 더 빨리 하교한다. 학업을 잇거나 자기 계발을 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 보니 유흥에 쉽게 빠진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아이는 아르바이트하고 싶다고 내내 조른다. 학교 가는 것보다 돈 버는 게 좋다고 말해서 내게 상처를 준다. 나는 순식간에 강도 만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는 강제로 포기를 경험한다. 공부로 대학 가는 길목에서 이탈한 아이는 경로를 완전히 틀어서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 하나 꿈이 없다. 엄마는 '아직' 없는 것이길 빌지만 내내 초조하다. 자기 꿈을 스스로 찾게 놔두자니 아이를 낭비하는 것 같고, 개입하자니 간섭하는 지질한 엄마가 되는 기분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불안해 떨었다. 아이는 1학기가 다 가버렸는데 적응 못하고 '내 인생은 왜 이러냐'만 남발하고 있다. 네 인생이 뭐가 어떻다고 배부른 소리냐, 그래, 네가 좋아 지낸다는 그 여자 친구는 집안이 풍비박산 나 가출 청소년이 돼서 친구네 집을 전전한다며 그걸 보면서도 네 인생이 왜 이러냐고 할 수 있는가 말해 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겨우 회복된 아들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이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꽤 고전했다)



앙통의 수박밭에 고양이와 개들이 찾아온 것은 부지불식간이었다. 걔들은 수박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 정갈하게 도열했던 수박들은 이리저리 흩어졌다. 단 하나의 수박을 향해 밤을 지새우던 앙통은 정신줄을 놓았다. 털썩 쓰러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진로를 결정지을 때까지만 해도 대학을 가네 마네 정도로 의견 충돌을 겪을 줄만 알았지, 아들의 연애사에 한 획을 그을 중대한 친구가 가출 청소년 일 줄은 몰랐다. 내 마음도 앙통의 수박밭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이럴 수가. 아들이 어찌 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나는 앙통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앙통은 이전보다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는 수많은 수박들이 남았다는 것을 보게 됐다. 하나에만 집착하던 앙통이 남은 것에 대한 소중함과 집착이 소거된 사랑을 깨닫는 부분에서 나는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알았다. 이제는 그 많은 수박들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고. 곧게 종대로, 횡대로 세워보려 하던 수고도 어린 시절 이후론 불가능하다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남은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걸. 또 한 번 그림책이 슬며시 내 손을 잡는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아들 상의 겨우 일부가 날아간 것뿐인데 그 역시도 아들을 형성하는 부분이란 걸 상기한다. 아들은 여전히 내 생애 최고의 사랑이다. 그는 지금 안전한 울타리에서 여름밤의 열기를 피해 청량하게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붙잡고 내려놓지 못하던 '고등학생 다움'에 대한 틀도 내려놓는다. 내 입맛대로 커가지 않지만 아이는 자라고 있고, 어른으로 가는 길목에서 자기만의 속도로 걷고 있다. 어른이 되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항상 선할 수도, 보편적일 수도, 신실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쩌면 나는 주인공이 원치도 않는데 혼자 열을 올리는 신입 경호원처럼 지나친 열정으로 강짜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마구잡이로 흩어 놓은 수박이 더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자란 것을 본다. 개와 고양이가 신나게 놀며 흩어놓고 간 밭 여기저기에서 생동을 맛본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훌쩍 아이들은 자란다. 엄마만 여전히 오래된 사진을 붙들고 눈물 쏟을 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바탕화면 사진으로 지정해 두었던 아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삭제하였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큰 키를 자랑하며 여자 친구와의 연애쯤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됐는데 나는 여전히 앳된 아들을 그리워하며 사느라 아무도 없는 밭에 홀로 외롭게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련하다고 탓하진 않을 거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게으르지 않았다. 기를 수 있는 방식으로 잘 길러왔다.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고,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농부는 해마다 농사를 짓는지 모르지만 나는 엄마가 처음이다. 사춘기 엄마도 처음이고 연애하는 아들도 처음이며, 학교 밖 세상에 힘껏 적응하는 아들도 처음이다. 아들은 알아서 잘 자랄 테니 나 스스로나 다독여 주어야겠다.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한 것, 잘못은 사과한 것, 여전히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응원하는 것에 대해 너 잘하고 있다고.



나는 아들에게 사과했다. 그런 애라고 한 건 미안했다고. 마구 퍼부은 말도 거의 진심은 아니었다고. 아들은 쿨하게 손을 내저었다. 손에는 여전히 여자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전화기가 들려 있다. 도로 들어가는 방의 문은 이제 쾅 닫히지 않는다. 어쩐지 싱싱해진 아들을 보면서 난 또 어쩔 도리 없이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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