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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영어 교사 Jan 06. 2021

친구의 아이 02

은영 12월 30일

태양이 반쯤 건물들 사이에 몸을 가리고 은영의 발아래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치형의 스테인리스 대문이 노란빛으로 태양을 튕겨낼 때 초인종 옆에 기대 선 은영은 발 밑에 깔린 자갈을 툭툭 발로 차며 집에 들어가길 망설인다. 왼손에 구겨진 불합격 통지서를 다시 한번 펼쳐, 혹시나 착오가 있었나 싶어 들여본 은영의 눈에 ‘불합격’이라는 글자가 여전히 단단하게 박혀 들어온다. 눈가에 흘러넘치려고 하는 눈물을 애써 참아보며 은영은 하늘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난 몇 달간 엄마와 은영은 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터넷 카페를 셀 수도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기숙사를 제공하는 전국 모든 고등학교들의 커리큘럼, 졸업생의 대학 진학 현황, 교내 활동들을 빠짐없이 조사하고 신중하게 선택했던 것이 은영의 부모가 졸업한 부산의 한 외국어 고등학교였다. 부산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지만 더 나은 선택지도 없었다.

이후 인터넷 카페에서 학교에 대한 게시글들을 읽고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지난 3년간 입학생들의 합격 점수 커트라인은 196.3점이었다. 은영의 중학교 최종 내신 점수는 196.5점. 여유가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점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체 왜? 왜 내가 불합격이지? 은영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슬픔이 아닌 억울함이 다시 한번 그녀로 하여금 악에 받힌 결심을 하게 만든다.

‘나는 절대로 미국에 따라가지 않을 거야.’



지난 몇 년간 지원과 탈락이 반복되었던 미국 LA 지점장직의 발령을 받고 상우와 혜진은 환희로 가득 찬 포옹을 했다. 상우의 찬란한 미래가 눈 앞에 다가와 있었고 세 식구의 미국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찬 부부는 참으로 오랜만에 섹스를 했었다. 혜진은 그동안 억지로 다녔던 보험회사에 사직서를 내기로 했고, 상우는 자신이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바람직한 이 시대의 가장.
다음날 은영의 거절 의사를 듣기 전까지는.

“나는 미국에 가기 싫은데?”
모처럼 교외로 나와 앉은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서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왜? 너도 유학생활 해보고 싶다고 항상 그랬잖아?”
“그건 대학에 간 이후 이야기지.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다니고 싶다고.”
“엄마랑 아빠랑은 벌써 결정을 했는데 니가 안 간다고 하면 어떡해? 나이가 몇 살인데 떼를 써?”
“아 나는 가기 싫다고!”

어찌나 테이블을 크게 내려쳤던지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처다 보는 시선이 상우에게 하나하나 등에 박히는 것처럼 따가웠다.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멍한 표정의 혜진의 팔을 잡고 식당에서 나왔지만 은영은 이미 멀리 사라진 후였다. 사춘기 딸의 치기 어린 반항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은영의 마음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부산에 있는 상우와 혜진의 모교에 진학하겠다는 딸의 통보와 함께, 폼나는 가족의 미국 생활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혜진이 바쁘게 짐을 정리하고 있다. 큰 가구들이 벌써 LA의 계약한 아파트로 보내져 버렸고, 집은 사방이 휑한 민낯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걸려 있던 가족사진을 혜진이 까치발로 떼어 놓는 것을 애써 쳐다보지 않으며 은영은 2층 자신의 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는다.

“엄마, 나 불합격이래.”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입 밖으로 내뱉자 생각처럼 두 다리가 힘 있게 은영을 받혀주지 못했다. 몇 계단을 채 올지 못하고 계단 중앙에서 힘이 풀려버려 주저앉았다. 손에 낀 흰 장갑을 허겁지겁 벗어던지고 다가오는 엄마 혜진의 얼굴을 보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슬픔이라기보다는 무력감에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은영아 이리 내려와 봐. 나중에 아빠 오시면 같이 이야기해보자.”
“아빠랑 말하면 또 잔소리만 할 텐데 말해서 뭐해.”
“그래도 방법을 찾아봐야지. 이렇게 운다고 해결되진 않잖아.”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아빠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속으론 분명 잘된 일이라고, 어떻게든 나를 미국으로 데려나가려고 하겠지.
“나 죽어도 미국에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소리를 지르고 나니 잠시 사라졌던 다리의 힘이 다시 생겨 자리에 일어났다. 최대한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고 방으로 다시 올라간다. 침대 옆에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불합격 통지서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다 은영의 눈이 반짝. 무언가에 끌리듯 휴대폰을 꺼냈다. 흥분한 손끝에서 단어가 하나하나 화면에 표시되고, 주저 없이 전송 버튼을 눌러버린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은영이예요. 저 아저씨 계시는 학교 지원했는데 탈락인가 봐요. 도와주세요 ㅠㅠ’

내가 가진 카드는 여기까지다. 이제 그들이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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