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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영어 교사 Jan 08. 2021

친구의 아이 03

진영 1월 2일

알람이 울리기 5분 전 진영이 눈을 떴다. 지난밤에 마셔 댔던 맥주의 냄새가 아직 남아 입 안 곳곳에 까끌거린다. 머리는 숙취로 띵했지만 눈은 의외로 쉽게 떠졌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잠자리를 대충 정리한 후 집 밖을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인다.
후 내쉬는 숨을 따라 연기가 눈 앞을 가린다. 연기는 추운 날씨 탓인지 지금의 숙취 때문인지 이리저리 좌우로 흔들거리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내 흩어진다. 밤 사이 쌓인 눈 때문에 발이 깨질 듯 아프다. 진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함을 열어본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은영이예요. 저 아저씨 계시는 학교 지원했는데 탈락인가 봐요. 도와주세요 ㅠㅠ. 2018년 12월 30일>
상우의 딸이 불쑥 진영에게 보낸 메시지를 켜고 아이의 단어 하나하나를 읽고 또 읽었다. 그 아이가 먼저 연락을 보냈던 게 언제였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이었을지도. 이것도 운명 이리라 생각하고 포기해버렸던 아이는 여전히 인연의 얇고 가는 줄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든 은영이 우리 학교 다닐 수 있게 노력은 해볼게. 혹시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뭐... 2019년 1월 1일>
5년 전이었나, 진영은 그 해 겨울의 동창 모임을 끝으로 고등학교로부터 이어진 대부분의 인연을 스스로 잘라 냈다. 시간은 당시에 오갔던 고성과 욕설들에 음소거 버튼을 눌러줬고, 질투와 집착으로 얼룩졌던 30대의 자신을 가려주었다.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진 후에도 세월은 흘러갔고 진영은 나이를 먹어갔다. 유별나지 않고 은근하게.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부패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발효되고 있었다.




어제 상우가 걸어온 전화는 진영의 정신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과거는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고 단단한 시간의 벽돌로 쌓아 둔 감정의 무덤에는 작은 균열이 생겼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결심과 아이를 입학시키겠다는 약속과 맞바꾼 것은 과연 잘한 일일까.
이 모든 것들은 제 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 자리는 내가 정한 자리여야 한다. 꽉 깨문 어금니가 아려오고 진영의 한쪽 뺨이 어그러진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오늘, 전화 대신 학교에 직접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진영은 아파트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나오는 진영을 이상한 듯 쳐다보며 민영이 물었다.
“여보 오늘 학교 가? 방학이잖아.”
“아 갑자기 급하게 처리해야 될 일이 있어서... 알잖아, 갑자기 사람 불러대는 거.”
대충 둘러대며 운동화를 발에 걸치며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밤새 폭설이 내린 주차장에서 10년도 넘게 탄 차의 시동을 걸 용기가 없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만들어 놓은 발자국들을 따라 밟으며 머릿속으로는 리허설을 앞둔 배우처럼 대사를 읊고 또 읊는다.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을 언제나 셀 수 없는 연습으로 맞서 왔던 삶이었다. 완벽하게 승리하진 못하더라도 추하게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전  날처럼 포기하고 돌아서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으리라.




진영을 태운 지하철이 남한강을 끼고 학교로 향했다. 얼어붙은 강의 끝과 끝을 훑어보며 은영이를 떠올린다. 언젠가 그 아이가 말을 배우고 글자를 하나씩 읽어갈 때 진영은 은영을 품에 안고 속삭였다. 나중에 니가 나이가 들어서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그때 꼭 다시 만나자고. 아저씨가 꼭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끌어안은 손에서 느껴졌던 박동을 잊지 않았다. 오랜 시간 얼어붙은 강 같았던 진영의 마음 한 켠에도 다시 미세한 박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영은 별관 3층에 있는 자신의 교무실에 들어간다. 방학 첫 아침이라 다행히 아무도 없다. 열린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이 비어있는 책상의 유리판에 튕겨져 나와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을 감싼다. 숨 막히도록 조용한 공간에서 무겁게 뛰는 박동 소리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우선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컴퓨터를 켜고, 직원 메신저에 로그인을 했다. 아직 입학 홍보부서의 부장은 로그인을 하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차기 교감 자리가 비공식적으로 확정된 국어 교사인 부장은 학교 재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무래도 위치나 재단과의 관계 때문에 이리저리 달라붙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항상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진영도 딱히 그녀와의 친분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승인만 해준다면 학교의 입학 예정자 중 한 명 정도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본관의 입학부서로 들어가는 문을 앞에다 두고, 진영은 은영이 자신에게 보냈던 문자 메시지를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내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이야.’



자신의 의지였는지 무언가의 이끌림이었는지, 확실치 않은 무거운 힘은 진영의 발걸음을 돌려 그를 학교 행정실로 향하게 만든다.
“계십니까?” 노크를 하고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내부를 체크.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오른손의 장갑을 이빨로 당겨 벗는다. 행정실 입구의 출입 키 버튼을 누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제발, 열려라.’ 마지막 번호를 누르고 별표를 꾹.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다행히 교무실과 행정실의 비밀번호가 같았다. 암기에 자신 없는 이들의 나태함에 건배를.

행정실의 문이 열리고 한 발을 안으로 내딛으며 진영은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끝이야. 너는 돌이킬  없는 강을 건너는 거야.

초조함과 흥분이 범벅이 되어 진영의 가슴을 쿵쿵 울려대는 소리가 켜진다. 외부의 소리에 귀를 막고 내부의 박동에 집중하기로 한다. 혹시나 범죄자가 되어 뉴스에 나오는 것도, 다시는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볼 수 없는 것도, 추악한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삶이 부서져버리는 것들도 진영을 막을 수 없었다. 도덕과 윤리와 법칙들에 거리낌을 느낄 새도 없이 진영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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