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 1월 1일
3년째 거의 모든 저녁 시간을 보냈던 독서실 책상에 앉은 은영은 딱히 공부할 거리가 없었다. 새해 첫날 아침부터 집을 나섰던 그녀를 보던 상우와 혜진의 놀란 눈빛을 애써 외면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어 거리를 한참 서성였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의 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고, 두 세 걸음이면 부딪히던 그 많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동네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눈 앞에 ‘엘리트 독서실 - 새해 연휴에도 정상 영업합니다’라는 안내 표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책상에 앉아 모눈 연습장에 의미 없는 선과 도형들을 그려대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의식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점심시간은 진즉에 지났던 것 같았다.
<은영아 아빠야. 아빠가 아까 외고에 다니는 선생님하고 연락했어. 왜 너도 알지 아빠랑 엄마 동창이 거기 다니잖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 일찍 들어와서 같이 고기나 구워 먹자 ^^>
희뿌연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문자 메시지를 멍하니 쳐다보며 은영의 기분이 살짝 풀린다. 일종의 승리감이랄까. 은영이 알기로 아빠와 진영 아저씨와의 공식적인 연락은 몇 년 전부터 끊어져 있었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자주 집을 들락거렸던 진영은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즈음부터 방문이 뜸해지더니, 곧 발길을 끊었다. 처음에는 왜 아저씨는 오지 않나, 아빠 엄마랑 싸운 거냐는 둥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왜인지 모르게 거북한 표정의 부모, 특히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던 터였는데...
내가 다시 연락을 하게 만들었구나, 새해 첫날부터.
묘한 성취감의 한 켠에서는 그간 너무 사납게 몰아붙인 자신에 대한 창피함과 사춘기를 무기로 쏘아댔던 말들에 대한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 엄마 아빠 미국 가실 때까지는 웬만하면 싸우지 말아야지’, 다짐의 말을 되뇌는 한편, 자신이 진영에게 도움의 요청을 했다는 것은 당분간 비밀로 내버려 두기로 한다.
답답한 체증이 내려간 공간에 허기가 밀려들어왔다. 휴대폰의 액정을 툭 두드리자 오후 두 시, 아직은 집에 돌아가기는 일렀다. 간단히 밖에서 뭐라도 먹어야지 생각하며 메신저 어플을 켠다. 1월 1일부터 불러내기는 미안하지만, 자신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줄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으니 넌 아마 좋아 죽을 거야.
<야 나 지금 밥 같이 먹을 사람 없는데 나올래? 여기 엘리트 독서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답변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이 느껴진다. 어차피 사귈 생각은 없지만 가끔 그의 이런 우직함에 기대는 자신을 느낀다. 밥은 내가 사기로.
<오 나 지금 집이야. 나도 밥 안 먹었는데 바로 간다 기다려.>
<응 빨리 와 내가 밥 산다 ㅋㅋ>
윤준은 동갑내기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3학년 때 은영의 키는 그 아이보다 훨씬 더 컸고, 한 대 쥐어박은 일로 양측 부모와 교무실에서 만났다. 잠깐의 소란과 사과, 그리고 화해가 지나갔고, 부모들끼리 서로 마음이 맞았는지 우리는 이후 가족 모임을 자주 가졌다. 만남의 시간이 반복되면서 윤준은 은영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은영이 이후 두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거치며 여전히 자신을 연애 상대로는 봐주지 않았음에도 언젠가 돌아올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듯이.
“은영아! 여기야!”
반대쪽 횡단보도에서 양 손을 크게 휘두르는 윤준의 모습을 보며 은영도 살짝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오늘 같은 날에도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뛰어나온 걸 보면 너도 참 듬직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문제가 시급하니까.
동네를 빙빙 돌다 겨우 문을 연 우동집에 들어가 앉으니 윤준의 안경에 뽀얀 김이 서린다. 테이블에 길을 내며 미끄러지는 물 컵을 휴지 한 장 뜯어 멈춰 세우면서 물었다.
“웬일이야? 오늘 같은 날 집에 안 있고?”
“아 그냥 좀 답답해서. 너는 왜 나왔냐?”
“친구가 밖에서 외로워하니까 당연히 나와야지. 얼른 일단 시키자.”
“난 김치우동 먹을게.”
“그래. 아주머니 여기 김치우동 두 개랑 유부초밥 하나 주세요.”
마지막 남은 유부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는 윤준을 바라보며 은영이 그동안의 일을 대충 설명했다. 미국에 가는 대신 한국에 남기로 했던 일부터 고등학교를 선택한 일, 그리고 불합격. 알고 지내던 아저씨에게 도움의 요청을 자신과 아빠가 했다는 이야기까지.
“뭐야.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우리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우동집을 나와 앞에서 걷는 윤준을 바라보며 걷던 은영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
“야! 아이스크림은 다음에 사라. 나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갈게. 오늘 나와줘서 고마워.”
걱정마라고 말하는 무심한 한마디에 은영은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계속되던 설득과 시퍼렇게 날이 선 거절이 반복되던 일상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듣게 된 위로의 말이었다. 대충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리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은영은 눈물을 훔치지도, 고개를 들어 흘러내리는 것을 막지도 않고 걸었다.
우연이 보내준 위안을 품 안에 조심스레 안았다. 세상이 아직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띠링” 집에서 고기를 구울 준비가 됐나 싶다. 오늘은 정말 화내지 말아야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고기 맛있게 먹어 ^^>
휴대폰을 손에 쥐고 주변을 휙 돌아봤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메시지의 발신번호를 다시 들여다봤을 때, 은영이 느꼈던 찰나의 위안은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변했다.
발신자의 번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