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영어 교사 Jan 15. 2021

친구의 아이 06

은영 1월 4일

주머니 속에서 진동 소리가 느껴져 한 손으로는 맥주의 목줄을,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쳐다보는 은영의 눈이 떨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 멍하니 화면의 글자만 쳐다보다 하마터면 목줄을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며칠 동안 길에 쌓인 눈 때문에 산책을 하지 못했던 웰시코기 맥주가 부쩍 두툼해진 엉덩이를 폴짝거리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은영은 제 자리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를 썼다.

‘대체 누구지?’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고기 맛있게 먹어^^> 

며칠 전 유건과 만났던 날, 모처럼 기분이 좋았던 오후에 받았던 메시지는, 발신자 번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뭐, 누가 장난을 치나 생각하고 메시지를 삭제해버렸지만 그 날 이후 줄곧 누군가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발신자의 번호 없이.

기분 나쁜 소름이 목 뒤에서 확 돋아나는 것을 느꼈지만 맥주의 즐거운 산책길을 망칠 수 없었다.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고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은영은 맥주에게 말했다.

“아가야 미안해. 얼른 출발하자!”

반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길에서 맥주는 그야말로 천방지축이었다. 사방을 물을 첨벙거리며 달려가다 이리저리 냄새를 맡아대는 맥주를 보니 좀 전의 소름 끼쳤던 감정이 다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들리던 애견 용품점에 가서 맥주에게 먹일 간식과 장난감을 잔뜩 샀고, 해가 어스름하게 질 때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맥주에게 묻은 진흙을 대충 씻어주고는 은영은 2층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망설여지긴 했지만 전원을 켰다. 불안함에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러다 정말 정신이 이상해질 것 만 같아 방을 나와 1층으로 향했다..

상우와 혜진의 이사 준비가 거의 끝나가는 무렵의 거실에는 낡은 2인용 소파 하나가 선반 위에 놓인 TV를 마주하고 있었고, 혜진이 멍하니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려대고 있었다. 오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엄마 무릎에 올라앉아 은영이 말했다.

“나 요새 이상한 전화가 자꾸 와 짜증 나.”
“왜? 무슨 전화?”
“몰라. 발신자 번호도 없고, 받으면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가만히 있어.”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혜진이 놀란 눈으로 은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놀라움이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에게 생기를 주는구나, 은영이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응. 그래서 몇 번 받다가 이제 아예 안 받아.”

그런 걸 왜 이제야 말하냐고 잔소리를 하다가 곧장 혜진이 통신사에 전화를 걸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지루한 기계음 끝에 연결된 상담원과 이야기를 하며 딸에게 이상한 전화가 자꾸 오는데 어떡해야 하냐는 등 몇 마디를 주고받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경찰 협조가 없으면 자기들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네. 조금만 기다려. 엄마 미국 가면 엄마 쓰던 전화기 써. 니 전화는 아예 해지해버리고.”
“알았어.”



괜히 걱정하게 만들었나 싶어 은영이 다시 방으로 올라갔을 때 책상 위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꾹 참았던 화가 치밀어 올라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줘야지 싶어 휴대폰을 들었을 때, 은영은 가까스로 소리를 지르는 것을 참아냈다. 휴대폰의 화면에는 발신자 번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저장된 번호는 아니었지만.

“여보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경상외고 입학 담당자입니다. 혹시 한은영 학생 맞나요?” 심한 경상도 억양의 남자가 말했다.
“네. 맞아요. 무슨 일이세요?”
“아... 저희가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입학 희망자들 점수를 매기던 중에 은영 학생 점수를 잘 못 확인했어요. 며칠 전에 불합격 통지서 받았었죠?”
“네...” 내용은 짐작했지만 최대한 모르는 척 은영이 대답했다.
“그건 잊어버리세요. 합격 축하드립니다. 신입생 반 배치고사가 이번 달 14일에 있는데, 올 거죠?”
“네 당연히 가야죠!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은영은 안도와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며칠 전 상우가 진영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며 학교에서 자신의 점수를 잘못 확인한 것 같다고 말을 했을 때, 은영은 198점이라는 숫자에 의아해했었다.
“내 점수는 196인데 무슨 소리야?”
“뭐 학교마다 점수 계산하는 방식이 다르겠지. 어쨌든 곧 전화 올 거라니까 모르는 번호라도 잘 받아.”
“그런가? 하여튼 알았어.”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막상 합격이라는 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진영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은영은 분명 전학 대기 번호 정도의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었다.

어떻게든 대기 번호라도 받아서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가지 않을 명분을 얻고 싶었는데 합격이라니. 그것도 중학교 내신 점수가 2점이나 올라서?

아무래도 꺼림칙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아 컴퓨터를 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중학교 내신 성적 산출을 각 고등학교들이 다르게 하고 있는지, 혹시 자신이 점수 계산하는데 착각했던 게 있었는지. 검색창에 질문을 넣고 얻은 답변들은 하나 같이  ‘아니’라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분명 은영과 혜진은 정확하게 은영의 점수를 계산했고, 국내의 고등학교들은 모두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를 하고 있었다. 덜컥 겁이나 인터넷 창을 모조리 끄고 컴퓨터의 전원도 껐다.



왜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나를 도와주는 거야?

진영이 점수를 조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다른 아이의 자리를 뺏었다는 죄책감에 한 동안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였다.

한참을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깨기를 여러 번, 짧은 꿈을 두세 번 정도 꾸다 보니 아침이 되었다.

눈은 떴지만 조금 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어렴풋이 발신자 번호가 없는 전화가 두어 번 왔던 게 기억이 났다. 휴대폰을 들어 통화 목록을 보니 정확히 세 개의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개의 붉은 글씨는 부재중 전화, 하나의 검은 글씨는 통화가 되었다는 표시.

은영은 애써 기억을 되살려본다.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은영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지만, 지나가는 시간과 돌아오는 그녀의 의식에 밀려 그 목소리는 점점 옅어져 버리더니,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의 아이 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