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요즘 정말 많이 야위셨잖아. 자주 아프시기도 하고. 너는 요즘 할머니한테서 변화를 못 느꼈니?"
"예전보다 많이 늙으시긴 했지. 그래도 난 할머니가 100살까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
"그래, 그러셨으면 정말 좋겠는데...."
"엄마, 나는 할머니가 나랑 약속한 것만은 꼭 지켰으면 좋겠어."
"그게 뭔데?"
"대전에 트램이 생기면 같이 타보기로 했잖아. 그때까진 꼭 살아계셔야지."
"맞다. 그랬지. 몇 년 뒤에 그게 생기려나. 할머니가 그 약속은 꼭 지키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만약에 대전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면 서울 할머니 하고라도 같이 타는 건 어떨까?"
아들은 아빠가 우리 대화를 듣지 못하게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엄마, 실은 나는 대전 할머니가 더 좋아."
"왜?"
"엄마의 엄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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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는데 왠지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이니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는 남편의 물음에 나는 엄마와 같이 맛있는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요즘 통 밥을 못 드시는 엄마를 위해 대전에 가서 함께 소고기를 먹고 왔다. 엄마는 엊그제 또 응급실에 들어갔었다. 남편도 야근을 하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고 한밤중에 아이와 단 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다행히 대전에 계시는 삼촌이 도와주셔서 엄마는 무사히 응급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엄마가 심장 시술을 한 지는 벌써 반년도 넘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던 담당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현재로선 아무런 효과도 없는 상태이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이상을 부정맥으로 응급실에 드나들고 있다. 제멋대로 빨리 뛰는 심장을 매번 전기충격으로 되돌려 놓고 있는데 이렇게 잦은 빈도로 전기충격을 받아도 괜찮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아직까진 매번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줘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다.
심장 시술에 이어 한 달 전에는 양쪽 신장과 요도의 중간쯤에 부목을 대는 시술도 했다. 약한 몸에 시술까지 해서 그런지 엄마는 갈수록 더 살이 빠지고 야위어가고 있다. 당신 스스로 올해 아님 다음 해를 넘기긴 힘들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라고 엄마를 다그쳤다. 하지만 실상 내 마음은 '정말로 그런 건 아닐까? 사람은 자기 목숨이 얼마나 남았는지 대강 안다던데 엄마가 정말로 그걸 느끼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럴 때마다 '워낙 겁도 많고 여리고 늘 내게 하소연만 늘어놓는 분이니, 말만 그러는 것뿐이지 괜찮을 거야.'라고 애써 합리화를 하면서 밀려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곤 했다.
하지만 엄마는 정말로 더 말라가고 늙어가고 있다. 그것도 하루하루 부쩍 심하게. 오늘 본 모습도 그랬다. 그에 대해 아무 말도 차마 꺼낼 수는 없었지만 측은하고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팠다. 여느 때처럼 이어지는 엄마의 투병 중계방송이 그다지 지겹거나 듣기 싫지도 않았다. 내 마음이 엄마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비난을 퍼붓고 싶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엄마는 왠지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에 나는 좀 더 당당하게 엄마의 죽음을 부인하면서 엄마에게 화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순해진다는 것은 엄마가 정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엄마의 죽음이 내 마음속에서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끔찍하고 무섭다.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잔인하다. 상대를 더는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이별 뒤에 느끼게 될 죄책감마저 미리 덜어내려는 이 얄팍한 이기심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렇다고 끝끝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 속에서 이별하는 것도 정답은 아닐테지만 말이다.
우리 가족이 탄 차를 바라보면서 멀리서 손을 흔드는 엄마. 엄마는 오늘 내 생일에 대해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내 생일날 엄마와 따뜻한 밥을 함께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행복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생일이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엄마가 있는.... 나는 오늘도 묵묵히 엄마를 위한 일들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를 사드리고 땀 흘려 청소를 해드리고 잠시 얼굴을 마주하고, 그리고 "잘하고 있어."라는 무뚝뚝한 말 한마디를 인사말로 남긴 채 말이다.
엄마는 오늘도 야위고 늙어갈 것이다. 그 속도는 내가 가늠할 수 없으며 시간을 붙잡아 둘 수도 없다. 그래서 이 밤이 지나가는 게 두렵기도 하다. 나는 막연한 불안에 떨며 잠 못 이루다 이 글을 남긴다. 글은 순간을 영원으로 박제할 수 있으니까. 오늘의 엄마와 나를 이렇게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