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의 1호 팬은 언제나 남편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 나에게 글쓰기를 독려한 사람 역시 남편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글을 쓸 수 없다고 완강히 부정해 오던 긴 세월 동안에도 남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틈만 나면 "당신은 글을 참 잘 써. 그러니까 글을 써 봐."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글쓰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을 하면서 시계추처럼 직장을 오가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내게 그 말은 그저 시시껄렁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지 않은가? 어느 날 보니, 나는 정말로 블로그와 브런치에 매일같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놀랍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조차 없는 인생의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조차도 외면해 온 참나의 모습을 알아봐 주고 믿어 주고 격려해 준 유일한 사람, 우주까지 달아나 숨고 싶을 만큼 민망한 칭찬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 나를 웃게 하는 사람, 그가 바로 나의 남편이다.
"곧 당신 책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오를 거라고. 봐. 틀림없다고!"
며칠 전 내가 올린 글을 읽던 남편이 갑자기 한 마디 툭 던졌다.
"자기야, 나 이제 안 아픈데?"
"......"
글의 말미에 있는 '아픈 남편'이라는 표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남편의 컨디션은 아주 좋다. 해마다 봄이 오는 시기와 맞물려 남편은 크게 계절 앓이를 하곤 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우울증 증상이 재발했고 바깥세상은 봄으로 불타오르는 동안 우리 집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가 얼어붙어 버렸다. 수개월을 숨죽이며 참고 견딘 후에야 서서히 삶의 시계가 다시 작동했고 우리는 그때서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긴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올봄은 달랐다. 남편이 큰 변화 없이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남편이 만들어 내는 삶의 멜로디는 평소보다 한 음 정도 높고 가벼운 상태이다.
이런 봄, 벚꽃이 비가 되어 흩날리고 철쭉이 시골 다방 레지처럼 시끄럽게 웃어대는 이런 봄, 오랜만이다. 나의 봄은 자주 봄이 아니었다. 봄의 기운을 빌어 무엇이든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설레는 충동을 느끼기보다는 무엇이든 그만 끝내고 싶다는 침체가 나를 집어삼키곤 했다. 그것은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고통 때문이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지구의 모든 곳을 비쳐도 딱 우리 가족이 있는 곳만은 비켜 가는 기분, 그런 거지 같은 기분에 나는 봄을 온통 잡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꽤나 밝고 가볍게 봄의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집 안에도 봄의 아늑함이 얌전한 고양이처럼 자리를 잡고 누웠다. 우리의 얼굴에 달라붙었던 슬픔과 불안의 혹이 올해는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이다 보니 남편은 스스로가 다 나았다고 믿고 있다. 앞으로는 재발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나도 역시 그렇게 믿고 싶다. 진심으로. 하지만 우울증은 생각보다 약아서 숨기를 아주 잘한다. 완전히 떠나버린 것처럼 몸을 숨겼다가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는 게 그 녀석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서 그 녀석을 온전히 내보내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평화로운 봄이 앞으로 얼마나 더 반복되어야 나는 정말로 안심하게 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남편의 경우 재발의 간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증상이 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으며, 증상이 발현되는 기간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기에 그때그때 맹목적으로 수용하면서대처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러한 과정들에 오랜 시간 길들여져 버렸고 그래서 쉽게 벗어나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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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말에 나는 농담으로 받아친다.
"당신 아픈 건 내 글감인데, 뺏어 버리면 어떡해. 지금은 안 아프지만 당신에 대해 쓰고 싶을 땐 뭐든 그냥 쓸 거야."
"그래? 그렇다면 마음껏 써."
남편은 처음부터 그랬다. 아무리 아내가 가명으로 활동하더라도 본인의 아픔이나 치부를 세상에 대고 광고하듯 떠들어댄다는 게 불편할 수도 있을 텐데 이상하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로지 나의 글만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응원해 주었다. 자신의 아픔을 글감으로 써서라도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다면 무조건 다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사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남편의 우울증과 연관이 있었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내 안의 마음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물가에 널어놓은 빨랫감처럼 적나라하게 펼쳐 놓고 싶었다. 그렇게 토해 놓은 글자들을 그저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상하게 위로를 받았다. 또 익명일지라도 누군가와 댓글로 소통하면서 그들이 주는 위로와 격려에 큰 힘을 얻을 수도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글을 쓰면서 고통에 의연해지는 힘을 길렀던 것이다.
살아온 경험상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얼굴로 느닷없이 우리를 다시 방문할지 알 수 없다. 많이 당황하진 않겠지만, 아주 많이 실망하기는 할 것이다.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라서 남편의 완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마음의 예방 주사를 놓고 있을 뿐이다. 다음번에 쳐들어올 녀석이 얼마나 강하고 지독하든지 간에 조금은 덜 아프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반드시 싸워 이기기 위해서이다!
새벽까지 글을 쓰고 부스스한 얼굴로 맞이한 아침, 남편이 묻는다.
"밤에 늦게까지 글 썼어?"
"응, 근데 나 자기에 대해 썼다."
"하하하, 그래? 나중에 로열티 내! 로열티!"
그와 나는 또 웃는다.
'내 글이 밥이 되는 날, 그 밥은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 먹게 될 거야.'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