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배나 차이 나네. 근데 실은 엄마도 아빠 없인 살 수 없어. 앞으로도 엄마랑 아빠는 헤어지지 않을 거고."
'혹시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을 아들이 귀신 같이 알아듣고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아니야. 그냥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알려줘. 무슨 말인지."
"너 바람이 뭔지 몰라?"
"아.... 알아! 담배 같은 거 피워서... 발암 물질 나오는 거?"
"뭔 소리야? 아~~ 발암... 그 발암 말고 바람이야. 풋! 담배 피운다고 헤어지진 않아. 바람이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가 있는데도 다른 남자나 여자를 더 좋아하게 되는 걸 말해."
"아~~. 난 만약 아빠가 바람피우면 엄마랑 살 거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아들의 대답에 나는 적잖이 당황해서 남편을 보고 장난치듯 말했다.
"자기야, OO는 엄마랑 산다네. 아들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바람피우면 안 되겠는데?"
아홉 살짜리 아들과 나눌 대화는 아닌데 이야기가 어쩐지 이상한 뱡향으로 흘러가 버렸고 바람피우면 아빠를 버리겠다는 아들의 단호한 말에 나는 괜스레 뻘쭘해졌다. 옆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아빠는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아들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진 탓이리라. 어이구 내가 이런다니까.
아들은 바람이란 말을 처음 들어본 모양이었다. 발암 물질 때문에 이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웃겨서 한참을 혼자 웃었다. '발암?' 하면서 자못 진지한 눈동자로 고민하던 표정이 생생히 떠올라 지금도 웃음이 난다. '발암 물질' 때문에 고기가 조금만 까맣게 타도 먹지 않는 아이이니 아홉 살 인생에서 '발암'은 아주 중차대한 문제이긴 할 것이다. 그나저나 '바람'을 '발암'으로만 알게 할 걸 괜스레 칙칙하고 구린 어른들 세계를 알려준 건 아닌지 영 뒤끝이 찜찜하다.
게다가 둘이 헤어지면 당당히 엄마랑 살겠다고 고백을 했으니 남편에게도 조금 미안해진다.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편이라 놀랍지도 않겠지만 내심 서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저나 노선 정리 한 번 확실한 아들이다. 든든한 아군을 얻었으니 행복하다고 해야 하려나,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좀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해야 하려나. 어릴 때 나는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아요?' 하고 물으면 '둘 다 좋아요.'라고 하거나 그 조차도 쑥스러우면 대답을 않고 발 끝으로 툭툭 땅만 쳤던 거 같은데. 우리 아들은 무슨 세대인지 몰라도(내가 아는 건 MZ세대까지가 다라서 요즘 초등학생을 일컫는 명칭이 따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기의 진심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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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작가가 된 후, 브런치 스토리 메인 화면에 매일 한 번씩 들어가 보고 있다. 거기에는 '요즘 뜨는 브런치북'이라는 메뉴가 있는데 총 20개의 작품이 인기순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한결같이 이혼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최상위권에 포진되어 있다. '이혼'이란 그만큼 우리 인생에서 결정타와도 같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혼'에 대한 글을 읽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본인 결혼생활에 불만족이 있거나 큰 문제는 없어도 지루한 결혼생활로 권태에 빠졌거나 아니면 이미 이혼을 한 경험이 있거나 지금 이혼 중이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남의 불행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발동해서일 수도 있다.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을 받고 있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그다지 끌리지가 않았다. 남의 결혼 생활을 훔쳐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이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역시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나만의 삶의 아픔을 솔직히 드러내 글로 풀어내고 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의 목적이나 이유와 상관없이 나는 나대로 '나의 글'을 그냥 쓰는 것이다. 그 작가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만의 아픔을 글로 풀어내고 그것을 솔직하게 세상에 보여주는 이유는, 결국 스스로 삶의 장애물을 넘고 시련을 극복해 나갈 힘을 얻기 위함이요, 새로운 삶을 향한 초석을 다지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분들의 브런치북이 인기를 얻고 작가 자신도 유명세를 타는 것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용기 내어 시작한 새로운 인생에 앞으로는 꽃길만이 펼쳐지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그럼 나의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이혼에 대한 무슨 거창한 사연을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다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나는 기혼자이고, 현재 이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누군들 이혼이 하고 싶어서 할까. 살다 보니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거고 결국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일들도 순전히 자기만의 고통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니 '이혼'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저 내 인생에는 나만의 '결혼과 이혼' 이야기가 존재할 뿐이다.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나만의 몫으로.
남편과 만나 연애부터 결혼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16년이 흘렀다. 그간 숱한 일들이 있었고 이별이나 이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남편의 병으로 인해, 남편과의 갈등으로 인해, 시댁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그 밖에도 기억나지 않는 숱한 이유들 때문에 나는 마음의 짐을 여러 번 쌌었다. 그럴 때마다 어떠한 계기로 그 고비를 넘기고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 건지 나 자신조차 잘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생의 순간순간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 뿐이다. 그 어떤 순간에도 나의 인생을 허투루 사는 사람은 없다.
한때 우리 부부는 딩크족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안 낳기로 결심하고 살았던 우리가 아이를 낳기로 한 건 어쩌면 아주 작은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우리는 과거의 생각과 마음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왜 그렇게 절실히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던 것인가를. 만약 계속 딩크족으로 살고 있었다면 왜 우리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답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인생은 섣불리 예단할 수도 가타부타 얘기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이혼'을 거부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 내게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막연한 불안으로 '이혼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금의 나와는 아주 무관한 이야기이고 특별히 남의 불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혼'이라는 것이 언제든 내게 닥칠지 모르는 예측불가한 운명 같은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가 아이를 낳았든 혹은 그 반대이든, 이혼을 하지 않기로 했다가 이혼을 했든 혹은 그 반대이든 우리는 늘 삶의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왔을 뿐이다. 선택은 순수한 자기만의 의지에 의한 것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환경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때도 있고 적당히 자의와 타의가 뒤섞인 것일 때도 있다. 나는 늘 이 점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았다. 타의가 90에 자의가 10일뿐인 선택이어도 결국은 내가 한 선택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삶의 중요한 선택들을 얼마나 순수한 자의에 의해서만 할 수 있었겠는가. 사십 대인 지금도 내가 하는 선택들이 순수한 나만의 의지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여러 가지 조건이나 상황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나를 일정한 방향으로 등 떠밀듯이 밀고 나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됐든 모든 선택의 최종 책임은 나에게 있음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순간,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선명하게 해결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만일 이전의 선택들에 나의 의지가 너무 적게 반영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면, 다음번 생의 중요한 순간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보면 될 일이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나만의 노하우가 늘어나고 나만의 인생 매뉴얼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전에 한 선택에 대한 후회에 시간을 낭비하거나 그에 따른 결과를 회피하는데 정열을 소모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이혼하지 않은 삶을, 아이를 낳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훗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조건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또 그때의 삶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의 선택은 오늘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고 나의 받아들임도 동시에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