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에는 기념일이 참 많다.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 날까지 그야말로 묵직한 기념일들이 대장부처럼 위풍당당하게 달력 위에 버티고 서 있다. 그 사이로 얼굴을 폭 가리고 지나가는 양반집 규수 같은, 눈에 띌락 말락 하는 기념일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게 바로 '부부의 날'이다. 부부의 날은 5월 21일이다. 21일에는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나는 이 기념일이 언제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풍문으로만 들어본 무관심한 날일 뿐이었다.
남편과 법적 부부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났고 실제로 함께 산 것은 15년이나 지났다. 함께한 세월이 짧지 않은데도 우리 부부는 살면서 이 날을 단 한 번도 챙겨본 적이 없었다. 둘 다 관심도 없었고 아예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올해 나는 왠지 부부의 날을 챙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거창하게 뭘 하지는 않더라도 21일이 되면 남편과 서로 덕담 한마디라도 나눠야지 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온 방 안을 두드려대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깨달았다. 오늘이 부부의 날이었다는 사실을.
'부부의 날'을 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2003년 12월 18일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가 제출한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을 위한 청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결의되면서 2007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전에 제정된 기념일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2007년이면 우리 부부가 동거를 시작하던 시기보다 약간 앞설 뿐이다. 무려 15년이 지나도록 이 날은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었던 걸까?
물론 살면서 부부의 날을 살뜰히 챙기는 사람들을 못본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부는 꽃다발을 직장으로 배달시키는 깜찍한 이벤트를 하기도 하고 선물을 주고받거나 오붓하게 외식을 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 나는 '참 별스러운 걸 다 챙기네.' 하면서 무심히 넘겨버리는 부류에 속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날은 가정의 달이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스럽게 만들어 놓은 듯한 궁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부!' 함께 살면 부부, 헤어지면 남남인 이상한 인연. '부부'라는 단어를 법적 부부로 한정한다면 결혼한 남과 여만 말하겠지만, 남과 여만 같이 사는 것은 아니다. 또 결혼한 사람만 같이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부부'라는 외연을 좀 더 확대시켜 그 안에 '생활동반자'의 개념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생활동반자'란 혼인이나 혈연관계에 있지 않지만, 함께 살며 서로를 돌보기로 한 이들을 일컫는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되면 다양한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사회를 구성하는 법적 단위로 인정하게 되고 생활동반자는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다. 2014년 진선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을 발의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2023년 용혜인 의원이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아직 통과되지 않은 상태이다. (출처 나무위키)
나는 지금의 남편과 동거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종종 요상하게 대화를 나눈다.
"자기야, 우리 결혼한 지 몇 년 됐지?"
"12년이지."
"그럼 우리 함께 산 지는 몇 년 됐지?"
"15년이지."
전자는 대외용이고 후자는 대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냐고 물으면, 자연스럽게 결혼식을 올린 때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를 계산하여 대답하곤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둘이 함께 살기 시작한 때부터가 우리 부부의 진짜 탄생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식이나 혼인신고는 함께 살던 중에 이루어진 하나의 형식이나 절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동거만 하는 커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이목이 피곤했고 양가 가족들을 설득시킬 능력도 모자랐기에 좀 더 규정된 테두리 안에 우리를 넣어두기로 했다. 혼인신고를 함으로써 사회적, 법적으로 인정받는 보호막이 생겼고 근거 없는 심리적 안정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 우리 둘의 관계가 결혼 전과 후에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출처 Pixabay
그간 '부부의 날'을 무심히 넘겨 왔던 건 내 마음에 '부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부'라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명목 하에 결혼하지 않은 혹은 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갈수록 이혼이 늘고 부부라는 제도가 예전만큼 결속력이 크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 '생활동반자법'이 통과되어 결혼하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생활공동체가 양산된다면, 자칫 전통적인 부부의 소멸을 재촉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이미 와해될 대로 와해된 제도를 억지로 강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생활공동체를 있는 그대로 용인해 주고 나아가 법적으로도 보호해 준다면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과 더불어 '모두가 예외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동체 사회'로 변화해 갈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법적 부부가 되어 함께 살면서 둘 사이에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오래된 인간 사회의 틀이다. 그것을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성끼리만 사는 것도(동성애자이든 아니든), 동성이 함께 살면서 입양한 아이를 키우는 것도,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함께 아이 없이 살거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도, 동성이 함께 살며 한 사람의 아이를 키우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의 법과 제도가 그런 예외를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미 서양에서는 가족의 다양한 형태들을 인정하였고, 생활동반자를 서로의 법적 보호자로도 인정해 주었다. 그들을 부부로서 혹은 부모로서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은 법이 좀 더 인간다워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만약 마음에 맞는 동성 친구와 함께 살게 된다면, 혹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 살게 된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런 법적 보호도 혜택도 받을 수가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처럼 보호자인데 보호자라고 나서지 못하는 슬픈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평생 동안 서로를 보살피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가족이 아니고 무얼까? 만약 두 사람이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면 그게 부모와 자식이 아니고 무얼까? 제도나 혈연만으로는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수많은 사연들을 사회와 법이 좀 더 너그럽고 따듯하게 포용해 주었으면 좋겠다.
잠자리에서 아홉 살짜리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내 친구는 엄마가 아빠랑 이혼하고 재혼했대. 아빠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이혼했대."
"그래? 그걸 그 친구가 직접 얘기해 줬어?"
"응."
"새아빠는 어떻다고 해?"
"괜찮대. 서로 잘 지낸다고 했어."
"그래? 다행이네. 부모가 이혼하기도 하고, 한쪽 부모가 먼저 돌아가시기도 해. 그럼 재혼해서 다른 엄마나 아빠랑 살기도 하지.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 나는 엄마랑 아빠가 헤어지는 건 싫어. 하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쩔 수 없겠지."
속으로 나는 겨우 초등학교 2학년 밖에 안된 아이들이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문득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가족의 개념은 어쩌면 어른인 나보다 훨씬 유연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나 안 된다고 하는 것들을 아이들은 사실 스스럼없이 수용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엄마, 만약 내가 엄마가 낳은 친아들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달라질 건 없어. 너는 이미 내 아들이야. 나는 네 엄마고. 너를 낳았기 때문에 네 엄마인 것만은 아니야. 너와 함께 쌓아온 추억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너는 영원히 내 아들이야."
"그렇지? 나도 그래. 엄마는 영원히 내 엄마야."
아들과 이야기하면서 진실로 이 아이가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한 번도 가정해 보지 않았던 아니 가정해 볼 필요가 없었던 일이지만, 우리의 서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되면서 사회의 기존 틀 속으로 편입되어 간다. 그 과정 속에서 아닌 것이나 안 되는 것에 대한 수많은 색안경들을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부부도 가족도 제도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이며 무엇보다 마음으로 맺어진 관계들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세상을 정형화된 틀 속에 가두어야만 안심하는 고약한 습관에 길들여져 있기에 자유와 선택을 방종이라 여기며 거부한다. 나부터도 이미 낡은 생각의 틀에서 잘 벗어나지 못한다. '나 때는'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신을 볼 때가 많다. 그만큼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보는 습관은 쉽게 바꾸기가 어렵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더 많은 선택의 주도권을 넘겨준다 해도 결코 세상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를 추억하고 아름다운 옛것을 지키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래를 희망하고 새로움을 펼쳐나가려는 노력도 중요하지 않을까?
'부부'라는 말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날을 꿈꿔 본다.
거대한 변화는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를 불신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보기로 오늘도 다짐한다.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