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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25. 2024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희생,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억지로

 - 이치나 조건에 맞지 아니하게 강제로.


 정신과 의사가 연예인들을 상대로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도 해 주는 프로가 있다. 챙겨보진 않지만 이따금 유튜브에서 한두 편 시청할 때가 있는데, 요 근래 본  개그맨이야기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음을 견디고 감당해 온 삶이란 저런 걸 말하는구나 싶어서였다. '억지로'와 '자발적으로'의 사이에서 외줄 타기 하듯 위태롭게 살아온 남자. 그렇게 살아온 남자의 얼굴은 어쩐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준 사람이지만 그의 얼굴은 이제 누구보다 어둡게 굳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억지로'와 '자발적으로'의 갈림길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가? 그런 상념에 빠져들자 나 역시 심장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12년 동안 어머니를 보살폈다. 젊은 시절 잘 나가는 개그맨이었던 그는 미친 듯이 일해서 번 돈으로 집안의 모든 빚을 탕감했다고 했다.  빚을 갚고 이제 좀 살 만해지나 할 때, 어머니가 병들었고 이후론 병원비와 간병 부담으로 결혼도 못한 채 나이만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는 오십을 넘긴 노총각이 되었고 이제라도 자신의 짝을 찾고 싶지만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소녀 같으셨다는 그의 어머니는 1인실만을 요구해서 병원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고, 요양원에도 절대 보내지 말라고 해서 끝까지 그가 직접 간병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12년을 헌신한 효자.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기나긴 간병의 고통에서 도망치고 싶던 순간들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꿋꿋이 버텨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조차 나오지 않더라는 그의 먹먹한 얼굴 앞에서 나를 포함한 스튜디오에 있던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삶을 오로지 견뎌기만 해왔으니 눈물도 메말라 버린 게 당연하지 않을까?


 사랑이란 것이 참 그렇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든 책임이 따른다. 하지만 사랑도, 그 사랑에 대한 책임도 '억지로'라면 무척 힘들다. 어디까지가 나의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강제인 것인지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올라오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그 사랑은 이미 '억지로'의 감옥에 갇혀 썩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희생, 어디까지가 최선인 걸까?




 그렇게 자신의 삶을 가족과 어머니를 위해 희생하며 산 그가 스스로를 서슴없이 불효자라고 자책하는 걸 보면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도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나는 젊은 시절 이미 부모님 곁을 떠나 '억지로'의 삶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외동딸로서의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책임을 외면하거나 저버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사는 동안 딱 한 번,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해 버린 순간은 있었다. 그것이 내겐 삼십 대에 감행한 가출이자 탈출이었다. 내가 그때 살짝 미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마도 나 자신의 삶은 하나도 개척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나이만 들어버렸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나의 부모 역시 자식의 자유보단 당신들의 안위를 더 우선시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나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나약한 인간은 때때로 살기 위한 본능으로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다.


  얼마 전 일본 작가 사에 슈이치의 '돌봄살인'을 읽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의 고통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소설이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결국 남편과 아들에 의해 죽음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가족의 손을 빌려서라도 죽기를 원했던 건 치매를 앓는 환자 자신이었다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었다. 투병하는 삶도 간병하는 삶도 얼마나 끔찍한 고통에 매몰되는지 경험해보지 않고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인간으로서의 존엄마저 무너진 채로 그저 몸뚱이의 상태로 전락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자신의 보잘것없는 사랑에 자책하면서 인간적인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당하는 삶이란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소설 속 가족들은 무척 잔혹했지만 누구에게도 감히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었다. 누군들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래도 그 개그맨은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걸 참고 견뎌냈다는 점에서 무척 존경스러웠다. 그의 발끝의 때만큼도 못 따라가겠지만, 나 역시 엄마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다. 그것이 해야 할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손쓸 수 없을 지경까지 엄마의 육신과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면 그때도 내가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지 두렵다. 나는 엄마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내 손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갓난아이를 키우듯 생존시켜 낼 수 있을까? 그렇게 엄마를 살리면서도 끝까지 '돌봄살인'의 가족들처럼 악의 마음을 품지 않고 선함을 지켜낼 있을 것인가? 나 역시 그처럼 엄마의 죽음 앞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영혼의 마비 상태가 되어버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공포에 가까운 물음들 앞에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인 삶을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어디서부터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거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선택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달라질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지극한 희생은 분명 그 자체로 삶의 의미이자 보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나는 나의 삶과 자식으로서의 삶의 균형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반성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면서 타협을 통해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 게 지금의 내 모습인 것이다. 나는 삶에서 그 두 가지를 다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누구한테 어떤 평가를 받든 상관없이.


 사랑으로 맺어진 아름다운 관계들이 희생과 책임으로만 얼룩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부모가 아픈 자식을 기르는 것도, 부부가 병든 배우자를 보살피는 것도 똑같은 일이다. 책임과 희생 앞에 최고의 사랑은 없어지고 최선의 사랑만이 남을 뿐이다. 그것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는 차후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나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희생'의 기준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대로 잘 살아왔고 나는 나대로 잘 살아온 것이다. 그러한 믿음과 긍정만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 선택이지 않을까? 그래야만 나 자신도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메마른 가슴으로는 그 누구도 진짜로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희생,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출처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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