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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18. 2024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단 '꾸준히' 하는 사람

나는 그렇게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다.

기어이

 -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 결국에 가서는.


그 어떤 것도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베토벤은 교향곡 하나를 쓸 때 최소한 12번 이상 고쳤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데는 8년의 시간이 걸렸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는 데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80번이나 다시 썼다.

박경리가 대하소설 [토지]를 쓰는 데 26년이 걸렸다.

괴테는 23세 때부터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해서 82세가 되던 해에 완성했다.

 -  아침을 여는 마음 산책, 고은정


 명작을 만들어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들으면 누구나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대단한 무언가를 각오하거나 꿈꾸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쓰고 싶어서 썼고 쓰다 보니 계속 썼을 뿐이다. 나는 '기어이'의 비장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기어이'가 풍기는 고집스러움과 억지도 거북하게 느껴진다.  '기어이' 해낸다는 것은 숨 막힐 정도로 막막하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갖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불사하고 온 생을 다 바쳐서 노력한다고? 약간은 바람 빠진 풍선 같기만 한 나의 의욕과 열정이 한없이 초라해 보여서 그나마 남아 있던 공기마저도 피식하고 새어나가 버리는 기분이 든다. '기어이' 해내는 사람들을 우러러보다 보면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제풀에 지쳐 그냥 포기해 버리기 십상이다. 근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다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다.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1년 10개월이 되어간다.  브런치는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나 혼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특별하고 신선한 도전이었다.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 안의 우주에서는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고, 내 영혼과 삶은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새롭게 재정비되어 갔다.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나는 얼마나 많이 달라져 있는가? 나의 글쓰기 성과가 무엇이었으며 블로그나 브런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따위의 표면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나는 내 인생이 이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아니 환상적일 정도로 나를 가슴 뛰게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쓰거나 글에 대한 생각을 해왔다. 직장을 다닐 때도 다니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하루가 멀다하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소설 습작을 하느라 발행 횟수를 일부러 줄였지만 글쓰기의 양이나 고민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깊은 고민과 고통 속에 빠져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글쓰기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글쓰기는 정신과 영혼을 중독시키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전업 작가냐 아니냐를 떠나 글을 쓰는 모두가 공감하는 글쓰기의 명과 암일 것이다.


 실제로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소소한 혹은 커다란 성과들도 있었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이 나의 글쓰기를 끊임없이 독려해 왔고 글쓰기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게 붙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이따금 '나는 왜 글을 쓰려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 앞에 서게 된다. 그럴 때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늘 높이 솟은 담 앞에 가로막혀 있는 듯 캄캄하고 막막해져버리고 만다. 글쓰기의 이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득이 내가 감수해야 할 손해나 고통을 대신할 만큼 대단한 것인가? 아주 낱낱이 까놓고 비교해 보자면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해가 되는 부분들도 많다.


 하지만 그 복잡한 대차대조표에도 불구하고 남는 결론은 계속해서 '써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글쓰기를 도저히 못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냥 지금처럼 뭐라도 쓰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인 것이다. 나는 헤밍웨이니 박경리니 하는 사람들 옆에 내 이름을 올리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쓰지는 못한다. 그들처럼 수십 년을 바쳐 명작을 만들어내고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없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 이 생을 열정 속에 불사르겠다는 광휘에의 갈망 역시 없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싶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렇게. '기어이'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마음은 없지만 '꾸준히' 번 해보자는 작은 다짐 정도를 가지고 말이다.


 글쓰기만 그러하겠는가? 무엇을 하며 살든 마음가짐이란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최고의 엄마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대단한 인물로 키워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이의 재능과 노력, 하늘의 운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서 희대의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이 탄생할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도 나는 하루하루 '꾸준히' 아이를 바람직한 어른으로 자라게 할 방법들을 공부하고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양육 속에 실천해 나가며 살고 있다. '기어이'라는 각오는 접어두고 그저 '꾸준히'말이다. 밖에서 보기엔 작고 시시해 보이는 노력이라도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그게 최선이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그래서 나는 결코 희대의 작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고, 난세를 구할 영웅의 어머니도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변함없이 사랑이 가득한, 글 잘 쓰는 엄마 정도는 되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작은 확률로라도 '꾸준함'이 빛을 발해 좋은 작가가 되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도 그들의 재능과 열정을 꽃피우기 위해 '꾸준함'이란 덕목은 반드시 필요했을 테니까!

 

 '기어이' 해내는 사람보다는 '꾸준히'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그렇게 비장해지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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