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아들은 그때 나이의 두 배가 되었고 나는 그동안 두 군데의 직장을 거친 후 휴직을 했다. 8년 넘게 살던 도시를 떠나 13년 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와 있고 어느새 오십이란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다. 명백히 내 육체는 시간의 타격을 입었고 외부에서 보는 나도 내부에서 느끼는 나도 지나간 세월을 잔뜩 껴 입은 채 아둔해져 버렸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은 아무런 충격도 축복도 받지 못한 것처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마치 지나간 시간과 그 속의 나란 존재가 모두 허공으로 가뭇없이 흩어져 버린 것만 같다. 이토록 허망한 시간 앞에서 나는 종종 몸서리를 치게 된다. '벌써?'라는 부사를 사납게 노려보면서 나를 통과해 간 수많은 시간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자꾸만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이다. 안타까움에 화도 나고 아쉬움에 서글퍼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은 똑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침은 규칙적으로 재깍거리며 앞으로 전진하고만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해서는 늘 생각보다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 과거를 얘기하다 보면 "벌써 1년이 지났네." "벌써 10년이 지났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지나간 과거는 빠르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지닌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복적이고 평범한 일상은 인간의 뇌가 굳이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하루의 대부분을 먹고 자고 반복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데 할애한다. 생존의 기본값만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평생토록 잊지 못할 특별하거나 인상적인 순간들은 그것이 행복이든불행이든 횟수와 빈도면에서현저히적기 마련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마치 성근 해면처럼 기억의 구멍이 숭숭 뚫리게되는 것이고 실제로 겪은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고 빠르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고요?
태어나서 현재까지의 시간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꽉 채우며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유독 과거를 상세히 기억하거나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모든 걸 기억하거나 모든 걸 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에게나 지나온 삶은 떠오르는 몇몇 개의 핵심 사건들로 짧고 간단하게 요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극소수의 장면들만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현재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되고 그 순간의 감정까지도 반복적으로 느끼곤 한다. 그렇게 '내 삶'이란 나만의 기억에 새겨진 몇 개의 사건들을, 나만의 편집과 각색을 거쳐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 놓은 개인의 고유한 서사일 뿐이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떠올리다 보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재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내 삶과 실제의 내 삶은 다르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기억하는 시간이 다르고, 실제로 겪은 시간과 느끼는 시간도 다르다. 여기서 시간의 상대성이란 오래된 진리가 다시금 떠오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우리는 서로 다르게 그 시간을 사용하고 기억하고 느끼며 살아간다. 대부분은 망각해 버리고 말 시간이지만 누군가는 그 시간의 길이를 늘이고 늘여 더 깊은 인생의 정수에 도달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시간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을까?
'벌써'라는 부사에는 미묘하게 다른 두 가지 개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듯 지나가버린 시간의 덧없음에 대한 한탄의 의미도 있지만,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완벽히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느끼는 감탄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왕이면 전자보다 후자의 편에서 시간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그 해답은 당연하게도 '몰입'에 있을 것이다.
몰입을 강조하는 수많은 책들이 있었다. 달리 말해 '선택과 집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몰입은 시간의 망각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충만감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가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고 산다면, 오늘보다 내일, 내일 보다 모레 더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 살아갈 날은 줄어들고 지나온 날은 잊어버리면서, 나의 인생은 야금야금 사라지고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순간이 영원이 될 수만 있다면 더이상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한숨지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를 망각의 세계로 인도할 몰입 거리를 찾는 게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한 필연적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결국은 몰입과 관련이 있다. 몰입하기 위해 글을 쓰는지, 글을 쓰다 보니 몰입하게 되는 건지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하나다. 산산이 흩어져버릴 것 같이 짧고 가벼운 생을 영원처럼 깊고 무겁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글만이 그렇겠는가? 사람들마다개성이 다르듯 몰입으로 들어가는 길도 제각각일 것이다. 분명한 건 나는 글을 읽으면 시간이 뜀박질하듯 달려가고 글을 쓰면 시간이 초고속으로 달아나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지나간 시간을 두고허무의 '벌써'가 아닌 환희의 '벌써'를 외치게된다. 당신을몰입의세계로 이끌고 가는 건 무엇인가요? 그것을 이미 발견했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만나고있다면 당신의인생은 꽤 충만한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