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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11. 2024

갑자기, 그러는 건 싫어요

그러면서도 나는 갑자기...

갑자기

 -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히.


 '임기응변'이라는 말이 있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맞추어 즉각 그 자리에서 결정하거나 처리한다는 뜻이다. 이런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저 입이 쩍 벌어지곤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크게 당황하지 않고 세상을 주무르는 듯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무대 위의 주연배우 같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지 못한다. 특히 말의 인간이기보다 글의 인간인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땀을 흘리고 느닷없는 상황에 안절부절못하며 '갑자기' 앞에서 수시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리고 다.


 나는 뭐든지 미리미리 준비하는 편이다. 내일 마감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적어도 오늘까진  놓아야 마음이 놓이고 약속 시간도 딱 맞추어 가기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게 불안하지 않다. 브런치북 연재를 하면서도 정해진 날짜에 글을 발행하기 위해 수일 전에 미리 써놓곤 한다. 한 개의 글을 발행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게 아니라, 다음번 글에 대한 걱정으로 금세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불안과 강박이 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정해진 약속은 지키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감당하기조차 버거워한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매사에 그렇다. 갑자기 생긴 약속, 갑자기 만난 사람, 갑자기 들이닥친 업무, 갑자기 다가온 사랑, 갑자기 일어난 사고.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청이가 되어버리기 일쑤다. 나란 사람은 늘 마음의 예열이 필요하다. 그게 무엇이든


 갑자기, 그러는 건 싫어요



 MBTI. 철저히 믿을 건 못되지만 무시하기엔 왠지 그럴듯한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고안한 성격 유형 검사이. 16가지 유형  나는 INFJ에 속한다. 아마도 J 성향의 사람들이 나랑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뭐든 갑자기 하는 건 힘들고 부담스럽지만, 충분한 시간을 준다면 차분히 하나하나 처리해 나갈 수 있는 약간의 완벽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한두 번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는 일명 '금사빠'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여자든 남자든 천천히 스며들 듯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의외로 '갑자기'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의 지축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중대한 일인 경우도 꽤 많다. '갑자기'는 싫지만 도망칠 수 없는 인생의 숙제 같은 부사이다.


 남편은 약속 시간에 느긋한 편이다. 연애 시절,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상영시간 목전에 영화관으로 달려들어간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엔 그게 너무 싫고 이해되지 않고 답답했다. 왜 미리 가지 않는 것일까? 왜 서두르지 않는 것일까? 왜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비하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일찍 가서 1시간 가까이 기다리기만 하는 나의 태도 역시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남편과 살면서 마음속으로 '천천히 해도, 조금 늦어도 괜찮아. 갑자기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제 우리는 늦지는 않지만 그다지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약속장소에 들어가는 일들이 많아졌다. 난 그 타협이 왠지 싫지 않다. 일어나지도 않은 '갑자기'를 걱정하고 대비하느라 내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갑자기'에 대한 경기에 가까웠던 거부감은 모두 나의 불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안다. 아이러니한 것은 '갑자기'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마음의 충동에 꼭두각시처럼 끌려다닌 적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정말이지 양면적이고 내로남불이 되기 쉽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보고 싶고,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 생긴다. 미치도록! 내가 보고 싶었던 그 사람에겐 내가 '갑자기' 연락한 불청객일 수 있고, '갑자기' 가고 싶었던 그곳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머나먼 곳일 수도 있으며, '갑자기' 먹고 싶은 그 음식은 하필 음식점이 휴무라 구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갑자기'의 충동은 그렇게 현실에 의해 좌절되기도 하고 때로는 충족되기도 하면서 묘한 줄다리기를 하지만,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강렬한 유혹이 된다.


 외부로부터 내게 닥치는 '갑자기'는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나의 '갑자기'는 왠지 용서가 되는 것,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것도 같다. 우리는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양면성 속에서 묘한 행복을 얻는 그냥 '인간'일뿐이니까. 나는 오늘도 '갑자기' 벌어지는 일들을 경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되도록 한 발 한 발 단단한 땅만 찾아 걸으며 내 삶이 안전지대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갑자기 툭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웅덩이에 푹 발이 빠져 버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런데 한편으로는 '갑자기' 그리웠던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기도 하고 먹지도 않던 술을 미친 척 마시고 싶기도 하며 아무런 계획도 없이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싶기도 다. 참으로 모순덩어리인 나이지만 그래서 인생은 지루하지 않은 아니냐면 멋쩍게 웃는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자신과 조금씩 타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그러는 건 싫어요.

 그러면서도 갑자기 나는....


출처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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