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감히'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는 강자 앞에서 꼬리 내릴 줄 알고 두려움 앞에서 숨 죽일 줄 아는 눈치 빠른 사람이었으니까. 매사에 '감히' 나서는 법이 없는, 수더분하고 조금은 순종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들에게는 이 '감히'라는 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뱉곤 하는 나를 본다. '감히' 그렇게 예의 없는 말을 해? '감히' 어른한테 함부로 덤벼? '감히'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해?아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심판자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엄격하게 꾸짖는 것이다.
하지만 '감히'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하게 일어서는 느낌이 든다. 아이가 정말로 '함부로 혹은 만만하게' 생각해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한 것은 아닐 텐데, 눈에 보이는 대로 아이를 평가하고 단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이 그다지 많지않을것이다. 어쩌면 힘 있는 자가 자리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서 '감히'를 악용하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권위나 권력에 맞서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무자비한 마음이 '감히'를 무기처럼 휘두르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도 어느새 어른이라는 감투를 쓰고 아들에게 '감히 네가?'라며 언성을 높이고 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기독교말씀이 있다. 누추하고 작고 낮은 곳에 신의 사랑이 깃들어 있으며 그곳을향하는 사랑이 진정으로 고귀한 사랑이라는 가르침이다. 그와 반대로 '감히'는 지나치게 높은 곳만을 지향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자만과 고독의 부사가 아닐까 싶다.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더외로워지는 게 아닐까?
아이의 마음에는 사실 '감히'가 없어요.
그러니 '감히 네가?'라고 말하지 말아요.
오스카 와일드의 '거인의 정원'이란 동화가 있다. 거인은 자신의 정원에 마음대로 들어와 시끄럽게 노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서 내쫓는다. '감히' 아이들이 자신이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이상하게도 거인의 정원에만은 봄이 찾아오질 않는다. 어느 날 뚫린 담장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나무를 껴안자 그때서야 나무에 꽃이 피고 새가 날아들고 잔디가 푸릇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거인은 아이들이야말로 진짜 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정원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되돌려준다.
거인의 모습은 욕심 많고 권위적인 어른을 연상케 한다.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으려는 욕심, 세상의 어떤 것도 자기 생각을 거스를 수 없다는 오만함, 그리고 힘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마음엔 결코 봄이 들지 않는다. 거인이 나무에 오르지 못해 슬퍼하는작은 아이를들어나무 위에 올려 주자, 아이는 거인의 목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거인이 작은 아이를 향해 온몸을 굽히고 낮추었을 때 비로소 외로운 거인의 마음에도 따뜻한 사랑이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말이나 행동이 부모라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기며 화를 내고 엄포를 놓았었다. 아들이 커갈수록 더욱 경직되어 가는 나를 보면서 '이런 훈육이 진정 아이를 위한 것일까?' 고민스러울 때가 참많았다. 감히 네가 부모한테 이래?라는 분노와 원망이 눈앞을흐렸던것은 아닐까 반성해 본다. 당장 아이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바로잡지 않으면 영영 비뚤어진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나를 과도한 심판자로 만들고 있었던것일지도 모르겠다.그러는 사이 나는 오지 않는 봄에게 투정만 하며 혼자만의 겨울 정원에 갇혀 있는 외로운 거인이 되어가는 줄도 모르면서...
아이는 나와 전혀 다른 인격체이고, 아이 자체로 온전한 아름다움이며, 내가 감히 해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이다. 네가 감히 할 수 없는 일들과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은 어쩌면 똑같을 지도 모른다. 그걸 모르고 '감히' 내가 어리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