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위 Apr 04. 2024

언젠가, 정말로 이별을 할 거야.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언젠가

 - 미래의 어느 때에 가서는.  

 - 이전의 어느 때에.


'언젠가'는 참 재미있는 부사이다. 과거의 어느 때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미래의 어느 때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든 미래든 뚜렷이 특정할 수 없는 시간의 한 지점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듯하다.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 과거와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우리는 쉽게 '언젠가'라는 부사를 붙이곤 한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는 모호함을 가득 품은, 조금은 시적인 부사 같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언젠가'를 떠올리면 이상은의 '언젠가는'이란 노래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사는 동안 수없이 흥얼거렸던 이 노래에는 지나가버린 젊음과 놓쳐 버린 사랑에 대한 회한이 껌딱지처럼 찐득하게 눌어붙어 있고, 한 술 더 떠 도저히 이루어질 거 같지 않은 재회에 대한 기약도 담겨 있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그대로'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말이 아닌가? 하지만 이상은은 '언젠가'라는 막연한 부사를 가져다 씀으로써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한다.


 실상 나는 미래의 '언젠가'에 대한 희망이나 꿈이 아주 크지는 않은 편이다. 오히려 기억력이 날로 쇠퇴해져 가는 지금은 과거의 '언젠가' 있었던 소중한 추억들에 대한 소멸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새로운 사랑이나 태어날 생명을 기다리는 젊은이가 아니라,  '언젠가 ' 닥쳐올 수많은 이별들을 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말로 이별을 할 거야.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OO아, 일로 와봐.

 왜?

 이 수납장 맨 아랫 서랍을 열면 통장이랑 계약서가 있어. 보이지? 그리고 여기 봐 봐. 장롱 아랫서랍을 열면 저 뒤편에 집문서와 비상금을 숨겨 어. 잘 알아 둬. 이제 엄마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알아 두라고.

 ........


 나는 갑작스러운 엄마의 고백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붉어진 눈으로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다 혼잣말하듯 작게 "왜 그래."라는 말을 주워 삼켰을 뿐이다. 당황하는 내 눈빛을 보았는지 엄마는 다시 고쳐 말했다. "당장 죽지는 않더라도 엄마가 정신을 놓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알려 주는 거야." 엄마는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오랜 세월 투병을 해왔지만 이런 유언장 같은 말을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정말로 엄마는 이별을 할 건가? 나와 삶과 이 세상과?'


 나는 엄마의 죽음이 언젠가 닥쳐올 일이란 걸 알면서도 실은 잘 알지 못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은 너무도 막연하게 느껴져서 별로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포하는 엄마의 잔인한 말들에 할퀴어 아팠었고 매번 새롭게 분노했었다. 딸의 상처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듯한, 가난한 모성애를 원망하면서...


 하지만 이상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을 하는 엄마가 밉지도 않다. 연민의 바다에 빠져 서서히 익사 중인 나는 하루하루 폐 속으로  차오르는 슬픔에 질식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나는 이별을 할 건가? 엄마와?'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잔인하다. 매일매일 엄마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하는, 너무 고통받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고통을 리허설하는 완벽한 배우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도 엄마는 당신의 육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를 내게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나는 알지 못한다. 엄마의 생명이 1년이 남았는지 10년이 남았는지... 하지만 엄마의 마음이 당신의 육체보다 더 빨리 이울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 곁에서 나 또한 너무 성급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언젠가'는 오늘이 될 수도 있고 한 달 뒤나 십 년 뒤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때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에 영원히 미래일 수밖에 없다. 수없이 연습을 하고 또 한다 한들 '언젠가'는 언젠가의 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내가 엄마의 죽음을 미리 슬퍼하고, 이별을 예행 연습하는 냉정함을 스스로 경멸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일이다. '언젠가' 정말로 엄마가 떠났을 때 나와 나를 둘러싼 우주가 어떻게 뒤집힐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언젠가' 다가올 한없이 막연하기만 한 이별들은....


 '언젠가' 엄마가 떠나고 시부모님이 떠나고 남편도 떠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아는 이들 모두가 떠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먼저 떠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아프고 아깝게 남겨두고서. 하지만 '언젠가'라는 말은 마취제처럼 미래의 모든 고통을 무디게 만들어 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고 안도하면서 이별을 유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날  일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 한쪽에선 조용히 그 모든 것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애써 모르는 척, 태연한  가면을 쓴 채로...


  '언젠가' 내게 올 화려한 성공, 넘치는 풍요, 가슴 떨리는 기쁨 따위를 위해 애걸복걸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이제 나는 삶에 대해 약간의 설렘만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봄바람 같은 살랑거림 속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는 동안 불행의 돌부리에 걸려 무릎이 까진 날들도 많았지만, 지나고 나면 대부분 '그땐 그랬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었. 모든 일들은 '언젠가'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 될 뿐이었고, 어떻게 추억하느냐에 따라 빛이 될 수도 어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언젠가 내게 올 좋은 것, 값비싼  것, 화려한 것들을 취하려는 욕심에 인생 전체를 담보로 내걸진 않아도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는 정말이지 '언젠가' 일어날 이별에 대하여 만큼은 담담해지고 싶다. 그것이 나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일지라도.  어쩌면 엄마는 이렇게 마음 약한 나를 뼛속까지  알고 있어서 오랜 세월 예방 주사를 놓듯 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또 예고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었던 예고편을 무시하고 외면해 온 나는 이제야 화들짝 놀라 본편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깨달음은 그렇게 한 발짝씩 뒤늦게 오는 법이다. 어리석게도 나는 늘 그렇다.


 언젠가, 정말로 이별을 할 거야.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없이...

 모두와 그리고 나 자신과!


출처  무아

#언젠가

#부사

#공감에세이

#이별

#죽음

#엄마의 죽음



 

이전 04화 감히, 네가 그럴 수도 있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