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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ug 15. 2024

제대로, 된다면 모든 게...

이태원 참사 다큐 '크러쉬'의 에미상 수상을 기도하며!

제대로

 - 마땅하고 알맞은 정도로.    

 - 마음먹은 대로.

 - (기본의미) 제 규격이나 격식대로. 또는 있는 대로.


 "제대로 좀 해 봐!" 우리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할 때 쉽게 이런 말을 내뱉곤 한다. '제대로'란 부사를 써서 상대방의 자존심에 제대로 스크래치를 내며 공격하는 것이다. 비난을 들은 사람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 내밀며 반문하게 된다. "도대체 제대로가 뭔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그러는 당신은 제대로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거야?" 그런 물음에 몇이나 당당하게 나는 제대로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은 얼굴을 붉히고 부끄러워하면서 속으로 자문할 것이다.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쉬(crush)'가 에미상 뉴스·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문을 접한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몇 해 전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하고 에미상 후보로 선정되었을 때 대한민국은 온통 흥분과 기대로 떠들썩했었다. 실제 수상으로 이어지자 모든 언론에서 실시간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뜨겁게 달구기도 했었다. 하지만 '크러쉬'라고? 나는 이런 다큐멘터리가 있는지도 몰랐고 에미상 후보가 되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에서 제작한 작품이고 우리나라에선 방영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당장 찾아서 보고 싶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볼 수조차 없다. 크러쉬는 이태원 참사 당시의 CCTV와 휴대폰 영상, 생존자, 목격자, 구조대원의 인터뷰 등을 토대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참사 다큐멘터리가 외국 예산으로 만들어져 외국에서만 공개되고 외국에서 주는 상의 수상 후보에까지 오른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이상한 현실 앞에서 나는 또다시 허무와 무기력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참사 소식을 전해 듣고 아무것도 믿기지 않았던 그날 그때처럼...

 '나의 눈과 귀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제대로 살고 있 걸까?'


 제대로, 된다모든 게...

 도대체 '제대로'가 뭔가요?




 9월 26일 에미상 수상작이 발표된다고 한다. 영화 기생충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보다 더욱더 두 손 모아 수상을 기도해야 할 일이다. 이태원 참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의 부끄럽고 추악한 민낯을 용기 내어 고백할 기회이지 않은가. 진실을 제대로 밝혀야만 절망이 쓸고 간 폐허 위에 새롭게 피어날 희망의 씨앗도 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국민들도 '크러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 본다. 그것이 정말이지 '제대로' 된 세상이지 않을까? 누구의 입도 막지 않고 누구의 눈이나 귀도 가리지 않는 세상!


 세월호 참사 때도 이태원 참사 때도 나는 늘 방관자에 불과했다. 내 삶이 그때의 사건들로 인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멀리에서 지켜보며 가슴 아파했을 뿐 진상 규명을 위해 혹은 생존자나 유가족들을 돕기 위해 온몸으로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물론 누구나 각자 올라야 할 인생의 산이 따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참사의 현장 곁에서 모든 걸 투신한 분들에게도 감당해야 할 자신만의 생은 분명 있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한 번도 비극적인 참사를 눈앞에 두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해 본 적이 없는 무심하고 비겁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나의 목소리를 낼 일이 전혀 없던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어쩌면 지금껏 한 번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하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크러쉬'란 다큐멘터리가 꼭 수상하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그 다큐멘터리를 찾아 감상함으로써 작품을 만든 분들을 응원하는 것, 내가 혹시 몰랐던 진실이 있다면 알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는 것,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을 유가족이나 생존자들의 안온한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 마지막으로 내가 쓰는 글들이 그들에게 보템이나 쓰임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정도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찾다 보니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한 정신과 의사가  용서를 구하는 데에도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상처받고 고통당한 사람의 진심을 헤아리지 않는 일방적인 사과는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닐뿐더러 피해자를 오히려 두 번 죽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 '제대로' 된 사죄와 용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우선 피해자와 가해자 둘 다 진실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밝히고 알아야 한다. 진실을 정확히 규명해야 피해받은 사람도 피해를 준 사람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잘못인지 분명해질 테니까. 그래야 피해자도 가해자를 용서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모두 알고 난 후에도 피해자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면 가해자는 피해자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섣불리 죄를 빌어서도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라는 게 아니다. 피해자가 용서를 받아줄 마음이 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무릎을 꿇고 기다리겠다는 진심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두 번의 참사가 있었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지만 가해자는 실체조차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하려는 노력은커녕 제대로 된 진실조차 밝히 않은 상태에 머물고만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반복적으로 겪으면 어쩌면 우리는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제대로'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부당한 힘의 횡포 둔감해져서는 안 된다. 진실이 무덤에 파묻히는 세상 역시 절대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 '크러쉬'에 대한 기사 하나가 서서히 닫혀가던 나의 양심의 문을 쾅쾅쾅 두드렸듯이, 이  역시 누군가에게 망각의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기를 빌어본다.


 제대로, 된다면 모든 게...

 제대로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치유할 수 있고 예방할 수도 있을 테니까.

 

    '에미상 후보' 이태원 참사 다큐, 9월 26일을 기다립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daum.net)


https://youtu.be/jHhbC4T2cd4?si=TB1HumKDrzzpIQ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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