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누에고치에서 깨어났고 드디어 살아서 꿈틀거리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었고 더불어 책을 내고 싶다는 바람이 가슴속에 살랑살랑 미풍을 일으켰다. 그 미풍은 글을 쓰면 쓸수록 더 강렬해졌고 어느새 태풍이 되어 내 안의 모든 걸 휩쓸어 버리기도 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간 글이 밥이 되는 경험을 했고 내 글이 여러 지면에 실리기도 했지만 나만의 책이 출간된다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만 보였다. 그래도 한 번 뿌려놓은 씨앗은 언젠가 싹을 틔우기 마련인가 보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의 연재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기적처럼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섬광처럼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로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의 연재가 시작되었다. 부사 하나로 글을 쓴다는 것이 흥미롭고 짜릿했지만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담스러웠으며 어떨 땐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하지만 묵묵히 연재를 이어나갔고 마지막 화에 이르기까지 총 60개의 부사로 글을 완성해 냈다. 이 모든 여정을 마무리 짓는 지금과 가장 잘 어울리는 부사로 '마침내'만 한 게 또 있을까?
마침내, 내 글이 책이 될 것이다.
지막
수많은 부사들 속에서 1년 가까이 울고 웃으면서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지고 있고 의식을 관통하는 '나'라는 존재를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전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나라는 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여전히 암흑 같기도 안갯속 같기도 하지만, 60개의 부사들이 놓아준 내면의 다리를 건너가는 동안 나는 나와 더 친숙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고 때로는 이해와 수용이 되기를 바랐다. 나 역시 나를 이해함으로써 나 아닌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한 뼘쯤은 더 자라날 수 있었으므로.
'마침내'라는 부사는 '마침'이란 단어의 의미 그대로 끝을 의미한다. 바라던 결말이 이루어졌을때나 원치는 않았더라도 충분히 예정되어 있던 결말을 맞이했을 때 우리는 '마침내'라는 말을 쓴다. 특히 이 부사는 영화 '헤어질 결심'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상적으로 각인되었다. 여주인공 서래가 한 대사들 때문이었다.
"산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 봐."
이대사는 서래가 죽은 남편을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에 영화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적잖이 당황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마침내'라는 말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마침내'라는 부사 하나 때문에 그녀가 남편의 죽음을 원했거나 남편의 죽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서래가 중국인이고 우리말에 서툴렀으므로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다시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이 대사는 서래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해준에게 한 말이다. 죽을 것처럼 서래를 그리워했던 아니 서래를 그리워하다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던 해준이기에 '마침내' 사는 것 같았을 거라는 서래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서래 역시 그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마침내' 사는 것 같아졌다고 고백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던 두 남녀의 재회는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마침내'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머릿속엔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하던 '마침내'가 잊히지 않고 오래 남아 있었다. 나 역시위험하고 불경스러운 '마침내'를 품은 적이 있었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도 차마 글로 쓸 수도 없는 '마침내'였다. 단지 가슴속에 은밀한 비밀로 남몰래 간직해 두었을 뿐이었다. 한편으론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마침내' 역시 가지고 있다. 내 소설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거나 내 글이 책으로 출간되는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의 출간은 내게 꿈같고 기적 같기만 한 '마침내'이다.
얼마 전아이를 낳는 꿈을 꾸었다.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내게 둘째의 탄생은 황홀할 만큼 놀랍고 기쁜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 동안 심장이 마구 뛰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바로 그날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 메일을 받은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말도 안 되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의 모든 연재를 마무리하고 나서 내가 직접 여러 출판사에 투고해 볼 작정이었다. 이름 없는 작가가 출간을 하려면 수십 군데 아니 백여 군데의 출판사 문을 두드려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출판사에서 먼저 연락이 온 거였다. 그것도 여타 작가들과 동등한 조건의 인세 계약으로! 출판사 대표님은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를 저마다의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이성보다 감성에 끌리고 논리보다 감을 믿는 사람이다. 살면서 내게 먼저 손 내밀어준 이들을 내쪽에서 먼저 뿌리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들 중에는 결국 나를 배반하거나 상처를 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나는 출판사 대표님의 진심을 믿고 덥석 손을 잡았다. 이 인연이 어떻게 흘러가든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결국엔 나의 운명일 것이다.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주사위는 이미 하늘 높이 던져졌다.이 세상엔 에세이를 쓰는 수많은 소위가 있고 소설을 쓰는 수많은 김하진도 있다. 그 안에서 과연 내 책이 생명을 얻어 비상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안될 이유를 찾으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마침내' 될 이유 한 가지를 가슴에 품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