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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Sep 26. 2024

아예, 하지 않으면 비난도 받지 않더라

뭐든 열심히 하고 억울해지는 이들에게 안녕을...

 -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이 아니라 전적으로. 또는 순전하게.


 직장인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성실하고 일 잘하는 사람한테는 일을 더 많이 시키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한테는 일을 덜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수도 더 하고 비난받는 일도 더 많건만, 일을 적게 하거나 안 하는 사람은 비난받을 일도 '아예' 없더라 것이. 상당히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들리지만 기나긴 사회생활을 통해 나는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모순을 일찌감치 깨우친 사람들 중엔 어렵고 힘든 일은 아예 안 하려고 버티거나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어릴 때 누군가로부터 이런 얘기도 들었다. "여자가 음식 맛있게 잘해봐야 평생 부엌에서 음식만 만드는 팔자 된다. 모름지기 자기가 잘하는 거 하면서 사는 법이다. 그러니 음식이나 집안일 같은 거 잘하려고 지 마라."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하면 일을 더 많이 시킨다니 그런 게 어딨어? 너무 부당하잖아.' 하지만 살다 보니 정말로 그랬다. 잘하면 잘한다고 더 시키고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일복이 거머리같이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문제는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실수나 잘못도 더 하게 되 어떨 땐 억울하게 비난받는 일까지도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과도 없지만 비난도 없다. 어쩌면 '아예'는 간이 제일 편하고 영리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과연 잘 사는 ?


 아예, 하지 않으면 비난도 받지 않더라.

 억울해질 바엔 '아예' 하지 말아 버릴까?




 엄마가 누워 있는 병상 옆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간병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효자, 효녀가 될 수 있겠구나.' 나는 하루에도 열두 번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산다. 선한 마음일 때는 묵묵히 고통을 감내하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다가 악한 마음일 때는 이것밖에 안 되는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어찌 됐든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겉 다르고 속 다른 인간인 것만 같아서 환멸을 느끼는 순간들이 더 많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엄마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언제나 엄마에게 웃어 줄 수 있고 아픈 엄마를 볼 때마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 솟아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억울함이 뱀의 머리처럼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마냥 착해질 수 있다. 누구로부터 비난받을 거리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의 전쟁을 치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속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얼마 전 준중환자실에서 본 할머니 한 분은 상태가 아주 위중했고 적어도 한 달 이상을 병상에 누워 계시는 중이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병원을 나갈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하루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딸과 사위 내외가 병실로 찾아왔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살가운 목소리로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거북함을 느꼈다. 아마도 노상 무표정한 얼굴로 목석처럼 앉아만 있나와 비교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화사한 딸은 보호자가 아니라 잠시 들른 문병객일 뿐이었다.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병실이나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처진 어깨와 그늘진 얼굴이 밤안개에 갇힌 듯 어둡게만 보였.


 순간 머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그녀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억지나 책임감이 아닌 진심으로 엄마에게 다정해지고 싶다는 생각, 그 가당치 않은 소망이 칼날이 되어 나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도 분명 그랬던 적이 있었다. 적어도 수년 전까지는 눈물바람을 하며 응급실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곤 했었다. 수없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동안 나의 감정은 마비되었 나의 영혼 역시 기계처럼 차가워져 버린 이었다. 그녀의 미소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녀의 해맑음과 선함, 잠시뿐일 친절이 가슴에 저릿한 통증으로 번져온다. 부러움일 수도 자책일 수도 절망일 수도 있는 혼란스러운 감정들 속에서 나는 한참 길을 잃고 헤맨다.


 이와 비슷한 일을 회사에서도 겪었다. 전임자들이 다 기피하면서 하지 않았던 일을 나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해놓았건만 감사를 받을 때는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아예' 안 했으면 감사 대상도 아닌데 일을 해놨으니 모든 게 다 감사 대상이라고 했다. 힘들게 한 일에 대해 무슨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하나 소명해야 했을 때, 나는 전임자들의 영리함과 뻔뻔함이 새삼 부러웠다. 그리고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한편으론 억울하기까지 했다. "아예" 하지 않았으면 것을! 한마디가 계속해서 가슴속에서 아우성을 쳐댔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나는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인간이다. 피치 못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나는 그냥 뭐라도 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예' 하지 않는다는 건 나로선  견디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양 극단의 감정을 품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라도 마땅히 이 일을 해내야만 한다. 나의 노고가 나의 악한 마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엔 비난받게 될지라도 달리 도리가 없다.


 요즘 강력하게 드는 생각은 모르는 것은 죄이고, 하지 않는 것은 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모를 수도 있고 모르는 척할 수도 있고 알면서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도 진정한 선은 아니다. 그러니 일부러든 몰라서든 '아예' 하지 않는 이들도 악하고 비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성실해서 남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 선해서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품게 되는 악한 마음은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이 품은 선한 마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이 품은 선함은 너무나 쉽고 가볍고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신 앞에서 내가 품었던 악한 마음들을 심판받아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또 억울함에 치를 떨지도 모르겠다. "아예 하지 말걸." 하지만 사람이 쉽게 달라지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아예'는 나와는 한참 거리가 먼 부사일 것이다.

 

 아예, 하지 않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자.

 악을 품은 선이 백치[白痴]선보다는 한 수 위니까.


#아예

#부사

#공감에세이

#선함과 악함

#아예 하지 않으면 비난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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