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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Sep 12. 2024

덜, 가진 자의 고통 아니면 여유

지금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 어떤 기준이나 정도가 약하게. 또는 그 이하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말이 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좋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하지만 더도 덜도 아니게 기준에 딱 부합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더'이거나 '덜'인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렇다면 '더'와 '덜' 중 어떤 것이 더 나은가? '더'는 왠지 과해서 부담스럽고 '덜'은 어딘가 부족하고 아쉽게만 느껴진다. 음식을 먹을 때도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남기더라도 일단은 풍족하고 많은 '더'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약간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모자란 '덜'을 선호한다. 나는 주로 후자를 선택하는 편이다. 남기는 것이 싫어서 애초부터 음식을 조금 시키거나 약간 부족하다 싶을 때 숟가락을 내려놓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더'라는 풍족함과 충만함에서 오는 기쁨도 크지만, '덜'이라는 부족함과 모자람에서 오는 여유도 그에 못지않게 내면을 꽉 채워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현저하게 부족한 결핍은 사람을 무척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덜'은 어떤 기준에 살짝 못 미친다는 것으로 아주 약간만 모자란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완벽할 때 행복한 게 아니라 완벽해지기 직전에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 포만감을 느낄 때보다 포만감을 느끼기 직전이 가장 기분이 좋고, 절정의 순간 자체보다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에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덜'에는 보기보다 강력한 힘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덜, 가진 자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여유로울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부터 7년 넘게 교사로 살았다. 나는 첫 월급부터 마지막 월급까지 한 푼도 남김없이 부모님께 드렸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과 생명보험, 자동차보험 해약금까지도 모두 다 드렸다. 텅 빈 항아리의 바닥을 긁어내듯이 탈탈 털어내 나니 나는 거지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다. 수녀원 행을 포기한 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갈 때 내 손엔 지인들이 격려금으로 준 현금 몇 푼과 한 보따리의 가방만이 들려 있었다. 닥치는 대로 작은 출판사에 취직을 했고 그달치 월세와 밥값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때의 내 상태단순히 '덜'이라는 부사로 표현하기는  힘들 정도로 원점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나는 궁핍한 처지에 대해  그다지 상심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월급을 받아 생전 처음 적금이라는 걸 넣기 시작했고  텅 빈 곳간에 한 푼 두 푼 돈이 들어가는  보는 게 마냥 재미있었다. 그땐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얼마나 더 가졌는지 '덜' 가졌는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삼십 대였으니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고 물욕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이도 했다.


 '덜' 가진 자의 삶은 아주 단순하고 간결했다. 객관적으로는 무척 가난했지만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며 일하러 갈 곳이 있고 심지어 돈도 모을 수가 있었으니까. 퇴사를 해서 수입이 끊겼을 땐 나라에서 실업급여를 주었고 그동안 열심히 일자리를 다시 구하면 되었다. 돌이켜보면 꽤 막막한 삶이었지만 당시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나는 '덜' 가진 자의 고통보다는 여유를 더 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십수 년이 흘렀고 나는 과거보다 확실히 '더' 가진 자가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스스로를 '덜' 가진 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객관적으로는 '더' 가진 자가 되었음에도 내면은 여전히 '덜' 가진 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있다면 '덜' 가진 자로서의 여유보다는 고통에 더 많이 시달리게 되었다는 이다. 방 한 칸에 살아도 불만이 없던 내가 이제는 더 좋은 아파트를 원하고 있다. 밤마다 편의점 빵으로 허기를 달래도 충분했건만 이제는 맛있고 몸에도 좋은 음식을 찾아다닌다. 예금 통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은 돈을 모으고 싶어 안달을 한다. 그러니 나는 '덜' 가진 자의 여유를 깡그리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누군가는 '덜' 가진 자의 여유란 말 자체를 듣기 거북해할지도 모르겠다. 지지리 궁상맞은 가난에 만족하며 사는 것은 무능력한 자의 자기 합리화이거나 게으른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라면서 넌더리를 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기에 더 많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지금껏 욕망에 충실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 욕망하고 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나는 과거가 그리워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의 '없음'이 아니라 그때의 '여유'가 말이다.


 단지 젊기 때문에 여유로웠던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삼십 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활화산 같은 욕망을 쫓아다니느라 갈급해지는 시기이다. 아마도 가진 모든 걸 남김없이 비워 냈던 경험, 그 특별한 경험이 나를 모든 욕망으로부터 잠시 초연해지 만들어주었던 것 같. 이후의 삶에서 나는 언제든지 그때로 되돌아갈   있다고 각오를 다지며 살았다. 하지만 운인지 노력 덕분인지 다시는 그때처럼 텅 빈 '없음'의 상태로 되돌아간 적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때를 은근히 두려워하면서도 이따금 그리워한다고 니 참으로 이율배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 하지만 진실로 그런 순간들은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무하며 여유를 가지라고 독려하는 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 상태가 최선이고 최고인 거라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기도 한다. 그런 억지 만족에 매달리는 것은 아마도 내가  어느 정도 가진 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더' 가진 자들이 '덜' 가진 자들에 비해 여유롭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빈 통장에 10만 원이 입금된 사람과 90만 원이 있는 통장에 10만 원이 입금된 사람 중 누가 더 여유롭다고 느낄까? 후자일 거라고 과연 확신할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통이냐 여유냐를 선택하는 건 철저히 자기 자신의 몫일뿐이다.


 하지만 누군들 고통을 선택하고 싶었을까? 여유롭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뿐이리라. 그런 면에서 나는 늘 되새길 원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기계의 리셋 버튼을 누르듯 원점의 상태로 되돌아간 경험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초심의 기준이 많이 다를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초심이 무엇보다도 막강한 무기가 될 거라확신하면서 종종 과거를 반추한다. 희부옇기만 한 인생에 짙푸른 문신처럼  새겨진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어떤 상황에 놓이든 '여유'를 잃지 않을  다. '덜' 가진 자는 고통스러울 수도 여유로울 수도 있다. 지만 분명한 건 오직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사실이다.  


 덜, 가진 자의 고통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덜 가진 자의 여유를 익히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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