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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Nov 07. 2024

시간, 공간 그리고 공허

잡다한 사색의 흔적들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시간은 나에게 부족하고

공간은 나에게 충분하고

공허는 나를 끌어당긴다.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중에서



 시간. 상투적인 고민. 살 만큼 살았다는 권태로운 생각 너머에 숨어 있는, 남아 있는 시간들에 대한 숨 막히는 두려움.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 한강 작가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시간에 대해 말했다. 지금까지 소설을 써 온 시간은 30년이고 앞으로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은 10년 남짓일 거라고. 그녀의 씁쓸한 눈빛이 내 얼굴을 덮었다. 수명이 길어진다고 해서 남은 시간을 내내 쓰기에만 매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처럼 잘 쓸 수도 없을 것이다.  냉철한 현실 감각이다.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내가 현재 엄마의 나이까지만 살아있다고 해도 30년은 더 쓰게 되지 않을까 하고. 참으로 비현실적인 망상일 뿐이다. 사십 대에 시작한 글쓰기에 나는 이미 급격히 시력이 나빠졌고 탈모가 왔 호르몬 분비에도 문제가 생겼다. 아마도 글쓰기가 노화를  앞당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즉,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직장에 다닐 땐 그런 생각이 없었다. 오늘치 주어진 일,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서는 퇴근시간이 되면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지나친 미련은 의도적으로라도 남겨두지 않았다. 늘 무언가 허전하고 공허하다는 느낌이 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쳐다보지 않으면 견딜 만한 수준의 거슬림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마침표 찍듯 살았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부터 더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쉼표뿐인 삶이 지속되고 있다. 이 가없는 시간의  늘어짐 속에서 나는 어느새 공허를 삼켜버렸지만 그 자리에 불안을 대신 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위태롭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만 있다. 나는 언제까지 이 가혹한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시간은 나에게 부족하다.




 공간. 나는 공간에 대한 탐이 없다. 아니 어떤 공간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공간들에 오래 담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공간은 늘 부족할 것이다. 나는 어쩌면 히키코모리처럼 살아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하지도 않고.


 아빠가 떠오른다. 꼭 지금의 나처럼 살았던. 단지 우리가 달랐던 건 아빠에겐 언어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배움이 없었기에 자기만의 언어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집에서만 생활하던 아빠는 꽤나 규칙적이었다. 동네 한 바퀴를 매일 오전 오후로 나눠서 두 번씩 돌았으니까. 나머지 시간엔 텔레비전에서 남이 두는 바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거나, 어디선가 주워온 전선들의 껍질을 벗기면서 보냈다. 돌아가신 뒤 방구석 한쪽에 산처럼 쌓여있던 구리줄 더미누렇게 생명을 잃은 아빠의 핏줄 같았다.  핏줄은 몇 만 원의 지폐로 바뀌었고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아빠와 공간의 사용법이 비슷한 사람이다. 다른 공간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고 한 공간에서 마치 장아찌처럼 절여져 짠내를 폴폴 풍기는 것이다. 다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냄새를 지닌 인간. 나와 아빠. 하지만 오래도록 친숙했던, 내 공간의 냄새이다.


 공간은 나에게 충분하다.




 공허. 공허는 블랙홀이다. '없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른 스펀지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인다. 공허가 나를 삼키고 내가 공허를 삼키며 우리는 결국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기 전까진 무척이나 불편하게 내 주위를 빙글빙글 맴돈다. 사냥감을 찾는 늑대처럼 어둠 속에서 눈을 번뜩인다. 나는 공허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한다. 잔인한 것에 온전히 빨려 들어가 녹아버리고 싶다는 야릇한 욕망을 느끼는 것이다.


 공허가 나를 끌어당기고 내가 공허를  끌어당기고 나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 좀 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느새 불안이란 녀석이 성큼 다가와 곁에 앉아 있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더는 공허하지 않은 상태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공허는 글쓰기의 먹잇감이다. 먹고 나면 다시 나를 채워 넣어야만 하는 공허. 어릴 때 본 영화에서 말했다. 공허는 없앨 수 없고 단지 채울 수 있을 뿐이라고. 나는 공허를 끌어당겨 나로 채우고 결국엔 글로 채운다.


 공허는 나를 끌어당긴다.




 에두아르 르베가 자살하기 전에 쓴 '자살'이란 책을 읽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완전한 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란 것도 시간과 공간 사이의 어떤 지점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고,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자신의 묘지를 미리 만들어 놓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묘지를 보며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한다. 자신이 죽기 전에 묘지를 본 사람들은 묘비의 날짜가 마치 죽음의 예언처럼 느껴져 으스스해할 것이다. 만약 자신이 묘비의 날짜에 정말로 죽는다면 더 이상의 거짓말은 중단되고 묘지도 그냥 평범해질 것이다. 자신이 묘비의 날짜보다 오래 산다고 해도, 묘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이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로 죽었을 때, 날짜를 일부러 일치시키지만 않는다면 자신은 더 젊어진 나이로 묘지에 묻힐 수도 있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존재 여부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육체는 죽지만 내 존재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살아 있는 자들의 마음속에 현존할 수 있기에 작가는 '자살'이란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초현실주의 작가인 '이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읽기에 불편했지만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으로 마지막장까지 작가의 독백에 귀기울였다. 에두아르 르베의 내면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죽음이, 그것도 스스로 계획한 자신의 죽음이 그다지 끔찍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소강상태가 네 삶의 고통스러운 동요를 이겼다.'

 -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중 마지막 문장


 양극단에 있다고 믿는 것들 대부분이 아주 멀면서도 지극히 가까이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존재와 부재 그게 뭐든지 간에.  나는 나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진 공허의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가고 있다. 이따금 살아 있는 게 정말로 맞기는 한 건가 의심스러운 상태로.....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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