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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26. 2023

엄마, 새 학교에 가면 완벽히 잘할 거야

학부모 상담의 명암

"엄마, 우리 이사 가잖아. 나는 새 학교로 전학 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거야. 그 학교 선생님은 나에 대해 모르니까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거지?"


"훨씬 더 잘한다고? 지금도 선생님께선 네가 아주 잘한다고 하셨어."


"엄마랑 상담할 때 선생님께서 나에 대해 완벽히 좋은 말씀만 하신 건 아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이젠 다 잘하잖아. 물론 아들은 전학 가도 잘할 테지만."





초등학교 2학년에 갓 올라간 아들과의 대화이다. 아들과 대화하면서 나는 속으로 무척 씁쓸하고 속이 상했다. 초등학교 2학년, 이제 9살. 무엇이 이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선생님과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까. 아들은 그리다 망쳐버린 도화지를 아예 찢어 버리고 새하얀 도화지에 밑그림부터 다시 새롭게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엔 아직 너무나 어린 철부지 어린애가 아닌가? 실수도 실수라고 지적하기 어렵고 잘못도 잘못이라고 몰아세우기 어려울 만큼 서투르고 모자라고 미숙한 어린애 말이다. 아들이 지금 그리는 그림은 뭐든지 다 밑그림일 뿐이다. 아직 어떤 색도 제대로 칠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의 색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 가련하고 안타까웠다.


코로나가 꺾이고 다양한 학교 행사들이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작년에는 학교에 방문할 수도 없었고 상담 역시 짤막한 전화통화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올해는 학기 초 교육과정 설명회와 학부모 상담을 통해, 아이의 선생님을 두 번이나 만날 수 있었다. 한 번은 직접 만남이었고, 한 번은 남편과의 만남 후 전해 들은 간접 만남으로였다. 아이에 대해 선생님이 한 지적은 아주 구체적인 것들로 사소한 생활 습관이나 언어 습관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직 학기 초일뿐이고 별다른 일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기에 상담 내용이 유별날 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아이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라는 아침인사를 하는 엄마이다. 너무나 상투적이어서 고사성어나 속담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이 말을 나는 앵무새처럼 반복해 왔다. 그러니 선생님이 하는 사소한 지적에도 내 마음은 태산을 짊어진 것처럼 불편하고 당장이라도 교정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데 지금부터 아주 작은 습관이라도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아이는 아직 어리고 한 해 두 해 크면서 저절로 성장해 나갈 텐데 미리부터 너무 걱정하는 건 아닐까? 지나친 걱정이 아이를 망친다는데 내가 그러면 어쩌지? 그래도 선생님 맘에 들지 않으면 학교에서 아이가 미움받을지도 모르는데 고치는 게 낫지 않을까? 머릿속에 모기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듯, 걱정은 끊임없이 또 다른 걱정을 부르며 마음을 어지럽혔다.


결국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들을 아이에게 전달하며 이런 것들은 고쳐야 한다고 오히려 강하게 훈육했다. 마음속으로는 이건 좀 과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이에 대한 나의 막연한 불안이 다른 모든 경우의 수들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아들은 조금 억울해하는 듯하더니 그래도 선생님 말씀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려는 눈치였다. 상담 이후로 실제로도 이전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그걸로 나는 만족했고 앞으로 선생님 눈에 나지 않게 아이가 더 잘하면 되겠지 하고 안심했다. 그런데 아들이 모든 걸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스스로  못난 엄마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면서부터 아이에 대한 불안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밖에서 받는 평가를 은연중에 나 자신의 평가로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작은 일에도 흥분하거나 크게 상처받는 것으로 안다. 소위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 누구의 지적이나 비난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아들은 개의치도 않는 사소한 것들에 내가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엄마와 자식이 한 몸에서 나왔다 하지만 아들은 만 8년 동안을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만의 삶을 조금씩 일구어 나가고 있다. 어느 날 보면 아들은 놀라우리만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여서 내 안에서 나온 존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좀처럼 아들에게서 분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의 불안은 다양한 부작용을 낳는다. 쓸데없이 아이를 의심하게 되고 아이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어주지 않고 감시하게 된다. 타인의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 휘둘려 아무 일 없는 아이를 심각한 문제 속으로 등 떠밀게 될 수도 있다. 윤우상 님은 '엄마심리수업'에서 엄마의 유형을 '초자아 엄마', '자아 엄마', '이드 엄마'로 구분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불안이 많은 '초자아' 엄마에 해당한다. 나 자신을 잘 알기에 나의 불안이 아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늘 의식하고 경계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 부딪히는 갈등 상황에서 나는 그만 이성을 놓아버리고 불안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초자아가 강한 엄마를 편의상 '초자아 엄마'라고 하자. 그 엄마의 특성은 대개 이렇다. 도덕적이며 착하게 살려고 한다. 남한테 싫은 소리를 들을까 봐 조심한다. 완벽하려 애쓰고 원칙과 규칙을 중요시한다. 가치 기준이 높으며 발전과 성장이 중요하다. 재미보다 의미를 우선하며 욕망을 억제하고 쾌락이 불편하다. 자기 검열을 많이 하고 반성도 많다.


출처  윤우상, 엄마심리수업



아들은 존재 자체로 생동감이 넘치고 아름다우며 빛이 나는 '어린이'이다. 아직은 고칠 것보단 배울 것이 많고 혼낼 것보단 칭찬할 것이 많은 아이일 뿐이다. 이 아이가 엄마나 선생님, 그 밖의 어른들로 인해 자기만의 도화지를 자꾸 찢어버리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때로는 엉터리로 그린 줄 알았던 밑그림이 새로운 밑그림과 만나 불멸의 명작으로 탈바꿈할지 어찌 아는가. 또 밑그림을 다 완성하고 색을 칠하고 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까지도 끝이 아니다. 유화를 그리듯 색을 덧칠하면 덧칠할수록 점점 더 나은 작품이 되어갈 뿐인 것이다.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 역시 여전히 덧칠을 하고 있는데, 이제 10년도 안 산 아이에게 완벽한 밑그림을 강요해서는 될 말인가.


학부모 상담은 상담일 뿐, 좋은 말씀이든 나쁜 말씀이든 참고하여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데 도움을 얻으면 된다. 아이에 대한 말 한마디 한마디, 평가 하나 하나에 천지가 개벽하듯 흔들리지 좀 말자. 엄마는 아이에게 하늘이다. 하늘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해가 비쳐도 항상 그 자리에서 변함이 없어야 한다. 아이가 오늘 그린 우주선이 내일 갑자기 로봇으로 돌변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엄마는 그저 '허허'하고 웃으며 ' 또 그려봐' 하고 격려하면 될 일이다.  


 원작 Viktor     모작  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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