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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May 31. 2023

휴직한 워킹맘 활용법

나보고 학부모 교통안전도우미를 하라고?

나는 워킹맘이었다. 과거형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휴직한 지 오늘로 정확히 두 달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전업맘 체험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워킹맘도 전업맘도 녹록지 않은 건 매한가지이지만,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간의 주름이 살짝 펴진 것도 같다. 어디까지나 휴직 두 달 차 워킹맘의 소회이니 전업맘이 결코 더 쉽다는 것은 아니다. 부디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엄마, 나 부탁이 있어."

"뭔데?"

"학교에서 안내장이 올 거야. 오면 엄마가 하겠다고 신청해 줘."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뭔가 다시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학교종이 앱에서 알림이 온다. 열어보니 '학부모 교통안전도우미 활동'을 신청하라는 안내장이다. 반별로 4명씩 학부모 지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나는 순간 당황스럽다. 이런 거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워킹맘이다 보니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 하는 학부모 활동이나 행사들은 대부분 쳐다보지도 않고 패스했다. 아이도 나에게 참여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데 휴직 두 달 차에 접어든 엄마에게 아들은 당당히 요구한다.


"OO아, 엄마는 이런 거 해본 적이 없는데... 꼭 해야 해?"

"엄마는 요즘 시간이 많잖아. 시간 있을 때 봉사활동이라도 좀 해."

"OO 이는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게 좋은 거야?"

"응!"


할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하고 싶지 않은 열댓 가지의 이유들이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다 궁색한 변명일 뿐이고, 아들 말대로 자유 시간이 많은데 봉사활동 좀 하면 어떤가. 아들의 강력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결국 그 자리에서 바로 신청 버튼을 눌러 버렸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무척 고맙다는 문자까지 왔다. 선생님들은 반마다 할당된 도우미 인원을 채우는 게 무척 부담스러울 터였다. 이렇게 하겠다고 먼저 나서주면 담임 선생님 마음도 편안하시겠지. 담임 선생님 입장을 생각하니 신청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통안전도우미가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학교라는 곳이 편치 않게 느껴질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학부모라는 자리에 대한 부담감일 것이다. 이상하게 OO이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가면 주눅이 들고 왠지 모르게 쭈뼛쭈뼛해진다. 잘못한 것도 없이 말이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도 철부지 어린애를 맡겨놓은 엄마의 맘은 그저 선생님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러면서 왠지 눈치가 보였다. 학교는 어린이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곳은 아니다. 아이가 학교 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말썽 피웠다는 연락 한 번 받은 적도 없다. 그럼에도 왜 나는 엄마라는 자리에만 서면 늘 당당하지 않은 기분이 드는 걸까. 잘해야 본전, 못하면 평생 멍에가 될 엄마라는 자리! 나는 늘 잘하려고 노력해서 힘들었고 잘못할까 봐 두려워서 힘들었던 소심쟁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학부모 교통안전도우미' 이게 뭐라고 긴장까지 되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밤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잤다. 하지만 알람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눈이 떠져 버리는 게 아닌가. 별일 아니 별꼴이다.  교통안전도우미에 어울리도록 튀지는 않지만 적당히 예쁜 블라우스에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향했다. 역시나 내가 1등으로 도착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고맙다며 음료수까지 전해주고 가신다. 노란색 조끼를 걸쳐 입고 노란색 깃발을 든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차가 올 때면 통행을 막고, 통행을 할 때면 차를 막아가며 연신 깃발을 요리조리 휘둘렀다.  

'뭐야, 어려운 것도 아니었네.'


출처  naver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사랑스러운 아이들 몇 명이 길을 건너며 깍듯이 인사도 해준다. 조끼에 쓰여있는 '학부모 교통안전도우미'란 글자를 읽은 모양이다. 이 작은 건널목에서도 얼마든지 사고는 일어날 수 있겠지. 작고 소중한 생명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하나 둘 짝을 지어 콩콩거리며 걸어가기도 하고, 엄마, 아빠, 할머니 손에 이끌려 총총총 끌려가기도 한다. 딴생각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지 싶다.


"엄마!!"

등교하던 아들이 차창을 내리고 나를 향해 환하게 손을 흔든다. 아들 얼굴에 가득 찬 만족감과 행복감. 이게 뭐라고 저렇게 기쁠 일인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아이의 마음이다. 남편도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웃는다.  


'그래, 아들아. 엄마가 이렇게 네가 다니는 학교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너는 자랑스러운 거지? 고맙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줘서.'


한 시간가량 봉사 활동을 하고 조끼와 깃발을 반납한 뒤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다. 내친김에 앞으로 다른 봉사활동도 참여해 볼까 싶다. 어제 아들과의 대화에서 '도서관 도우미' 이야기가 나왔었지. 이제 이 주 뒤면 전학을 가니 그 학교에선 '학부모 도서관 도우미'로 활약해 볼까나? 아이는 엄마의 휴직에 맞춰 다니던 태권도 학원까지 그만두었다. 그저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엄마랑 뒹굴뒹굴거리며 노는 게 유일한 낙인 한량이 되었다. 놀다가 둘이 눈에 불이 붙으면 티격태격 싸우고,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끌어안고 뽀뽀하고, 그러다 또 토라지면 서로 말도 안 하고 종일 이러고 있다. 아주 유치 찬란한 전쟁이 따로 없다. 


"너 학원은 안 다녀?"

"응, 아무것도 안 다닐 거야. 그냥 이렇게 집에서 엄마랑 있을 거야."

"배우고 싶은 것도 없니?"

"응, 없어."



나는 분명 휴직했는데, 어째 더 고달픈 자리에 재취업한 것 같다.

OO이 엄마로 말이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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